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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공의회(6) 에페소 공의회(상) (431년)

하느님의 모친이냐 그리스도의 모친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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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던 에페소 성모마리아 대성당 유적. 평화신문 자료사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이집트 북단 지중해 연안 도시 알렉산드리아. 일찍부터 북아프리카 지중해권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70인역`이라고 하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이 번역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후 로마,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예루살렘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5대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알렉산드리아를 주요 무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하는 교리 신학 학파가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나 교리 해석에 있어서 은유적이고 비유적 표현 방식을 즐겨 사용하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번창했던 또 다른 고대 도시 안티오키아도 그리스도교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터키 땅에 속하는 안티오키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사도 11,26). 이 안티오키아 역시 5대 교회 가운데 하나로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서열 세 번째 교회로 지칭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안티오키아를 중심 무대로 `안티오키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다르게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과 교리 해석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하는 자의적(字意的) 해석과 역사적 접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요.

 에페소 공의회 이야기를 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진리 추구와 이해에 있어서 색깔이 다른 이 두 학파의 대립과 마찰이 에페소 공의회는 물론 그 이후 칼케돈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배경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지닌다고 천명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 또한 신성을 지닌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공의회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으로 계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5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학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지낸 성 치릴로(380~444)가 있었고, 안티오키아 학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네스토리우스(381~451)가 있었습니다.

 치릴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 복음 1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인간 예수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자칫하면 인간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은 사라지고 신성만 남을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네스토리우스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예수가 온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씀이 인간 예수 안에 머문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자칫하면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쓴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 노선은 사실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내 것만을 주장하면 오히려 그 반대가 되기 십상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이 그랬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시작됩니다. 발단은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부임하면서 데려온 비서 신부 아타나시우스가 제공하지요. 이미 3세기쯤부터 교회 안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그리스어 테오토코스)으로 공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의 모친`이란 표현이 잘못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일 따름이어서 하느님의 모친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00년 동안이나 별 문제 없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으로 불러온 신자들과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습니다. 반발이 심해지자 네스토리우스는 중재에 나섭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그리스어 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데서 오는 위험(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존중하고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안 역시 교회 초기부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해온 신자들의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가 이 논쟁에 개입합니다. 그는 예수의 육신이 하느님의 육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육신일 따름이라면 어떻게 그 죽음이 구원을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네스토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성을 강조하고자 `하느님의 어머니` 대신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치릴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하지만 치릴로가 이 논쟁에 개입한 것은 신학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 평가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간 대립과 경쟁,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이후 급격히 부상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위상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경계와 시기심 등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대립이 심화되면서 치릴로는 로마 주교인 교황 첼레스티노 1세에게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고발합니다. 교황 지시로 430년 8월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열흘 말미를 주면서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단죄하고 추방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물론 치릴로였습니다.

 첼레스티노 1세 교황이 이단으로 로마에서 추방한 펠라기우스(350?~425?)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받아들인 적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교황에게 밉보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이 결정에 따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네스토리우스가 볼 때 치릴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죄받은 아폴리나리우스 이설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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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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