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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7) 에페소 공의회(하)(431년)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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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회 소집과 진행 과정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0년 11월 19일 제국내 모든 관구장 대주교들에게 회람을 보내 431년 성령 강림 대축일(6월 7일)에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명의로 소집 통보가 전달됐습니다.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에서 70여㎞ 떨어진 곳에 있는 유적지인 에페소는 당시에 번창하던 항구 도시였지요. 지금은 폐허가 된 채 유적만 일부 남아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회의 장소였습니다. 교황 첼레스티노 1세는 사절들을 파견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와 뜻을 같이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치릴로는 그만큼 교황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공의회는 예정보다 보름 정도 늦어진 6월 22일에 개막해 첫 회의를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대표로 하는 네스토리우스 측 주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가 의사봉을 잡고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일부 주교들이 반발했지만 치릴로를 따르는 다수파에 의해 묵살됐습니다. 참석 주교는 처음에는 160명이었는데 저녁에는 198명으로 늘었습니다. 대부분이 치릴로를 지지하는 편이었습니다. 교부들은 니케아 신경을 낭독한 후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가 벌인 논쟁을 차례로 검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자 영혼과 육신을 갖춘 온전한 인간이라는 치릴로의 주장이 니케아 신경에 부합하다고 인정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합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비롯해 네스토리우스 지지파 주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사절인 칸디디아누스는 공의회 결정 사항과 반발하는 네스토리우스의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비롯한 주교 43명은 뒤늦게 도착해 6월 27일 자기들끼리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대립 공의회인 셈이지요. 이들은 거꾸로 치릴로와 에페소 주교 멤논을 제명하고는 그 결과를 황제에게 통보합니다. 황제는 이 대립 공의회에 손을 들어줍니다.


교황 지지 받은 치릴로파 주도로 니케아 신경 확인
이에 네스토리우스파 대립 공의회 열어 갈등 악화
후임 교황과 황제 주선으로 두 학파간 잠정적 화해
`그리스도에 신성·인성 함께 있다` 교의 확립 의의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치릴로 편인 교황 사절 3명이 7월 10일 뒤늦게 에페소에 도착하면서 회의가 속개됩니다. 7월 31일까지 모두 7차에 걸쳐 회의가 열립니다. 이를 통해서 공의회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주교들의 으뜸이며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과 추종자들이 개최한 대립공의회는 무효이고 △니케아 신경에 아무것도 보태서는 안 되며 △오류를 범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재확인합니다.

 비록 네스토리우스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대립을 종식하고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에페소 공의회는 오히려 분열된 공의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을 모두 무효화하면서 안티오키아 주교들 없이 독자적으로 공의회를 진행한 치릴로와 에페소 주교 멤논은 물론 네스토리우스까지 체포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파면합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칼케돈에 모여서 다시 토론을 벌이지만 소득 없이 끝납니다. 마침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9월 11일 에페소 공의회의 폐회를 선언하고 치릴로를 제외한 주교들에게 자기 교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 공의회 이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갑니다.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서 쫓겨난 후 안티오키아 근처 수도원에서 지내지요.

 그러는 사이 교황 첼레스티노 1세는 432년에 선종하고 후임 식스토 3세가 새 교황에 오릅니다. 새 교황과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치릴로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학파간의 대립과 논쟁을 종식시키고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치릴로를 따르는 알렉산드리아 측과 요한을 따르는 안티오키아 측 간의 화해를 주선합니다. 오랜 절충 끝에 433년 4월 마침내 합의가 이뤄집니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를 따라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받아들입니다. 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는 단일한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치릴로는 에페소 공의회 선언에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성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는 개인적 주장을 덧붙이지 않기로 합니다.

 이렇게 격렬하게 대립하던 두 교회 혹은 두 학파 간 평화가 일단 회복됩니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였습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근처 수도원에서 아라비아로, 그곳에서 다시 이집트로 쫓겨갑니다. 그를 추종하던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됩니다. 이 교회를 경교(景敎), 혹은 대진경교라고 하지요. 대진(大秦)이란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중국에는 당나라 때인 635년에 전파됐다가 원나라 때인 14세기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 공의회에 대한 평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문제가 발단이 된 에페소 공의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고 지혜롭게 다루기보다는 치릴로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학파 간의 대립과 갈등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끝났지만 실질적 소득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에페소 공의회 자체보다는 공의회가 끝나고 나서 타협을 이끌어낸 433년의 결정이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페소 공의회는 교리적 면에서 중요한 진전을 했습니다. 성자의 신성을 확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어 에페소 공의회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교의를 확립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교리를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명료화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후에 공의회가 다시 열리게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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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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