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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6> 17. 바젤-페라라-피렌체

연합 교령 발표하며 동방교회와 일치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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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페라라에서 피렌체로 옮겨간 공의회가 1439년 2월 첫 회기를 시작한 장소다.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로 옮겨간 공의회 소수파는 1438년 1월 8일 페라라 주교좌 성당에서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대주교 4명에 주교 20명이 참석한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1월 말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페라라에 도착하고 이어 동로마 제국 황제 요한 8세 팔라이올로구스를 비롯해 동방(그리스) 교회 대표단이 도착하는 등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하여 동ㆍ서방 교회 대표가 함께 하는 첫 회기가 4월 9일에 시작했고, 교부들은 페라라 공의회가 보편 공의회임을 승인하는 교령을 발표했습니다. 페라라 공의회는 그해 10월 2차 회기를 시작했지만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공의회 장소를 다시 피렌체로 옮기기로 함에 따라 별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공의회는 이듬해 2월 하순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속개합니다. 동ㆍ서방 교회의 일치 문제를 집중 논의했는데 핵심 쟁점은 서방 교회가 주장한 △연옥 교리 △성찬례 때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기 △신경에 필리오케(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한다는 것) 삽입하기 △교황 수위권 문제였습니다.

 진통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연옥 교리와 관련, 죽은 후에 어떤 영혼들은 연옥에서 불로 정화를 거치며, 어떤 영혼들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또 어떤 영혼들은 천국에서 각자에게 상응하는 복락을 영원히 누린다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성찬례 때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방 교회는 이 관습을 계속 시행하되 동방 교회에서는 누룩을 넣은 일반 빵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필리오케` 문제와 관련, 라틴 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는 표현을 계속 주장한 반면 동방 곧 그리스 교회 대표들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나온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신앙정식에 아무 것도 보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인하면서 성령과 성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나온다는 표현을 선호했습니다. 결국, 두 표현이 같은 신앙 고백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교황 수위권 문제에 대해서도 양측 주장을 다 수용하는 선에서 타협안이 마련됩니다. 로마 주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지닌다는 라틴 교회 입장도 담고, 로마 주교가 다섯개 총대주교좌 가운데 으뜸이기는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다른 네 총대주교좌들의 모든 특권과 권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동방 교회의 입장도 담습니다.

 이리하여 동ㆍ서방 교회의 연합 교령이 피렌체 공의회에서 탄생합니다. 교령 제목은 `기뻐 환호하라, 하늘들아`(Laetentur caeli)였습니다. 연합 교령으로 동방(그리스) 교회와 일치를 이룬 후 피렌체 공의회는 계속해서 아르메니아 교회(1439년 11월)를 시작으로 단성설을 추종한 이집트 콥트 교회(1442년 2월)와 일치를 이룹니다.

 공의회는 1443년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으로 회의 장소를 옮깁니다. 그리고는 시리아 교회(1444), 칼데아 교회와 마론파 교회(1445)와도 잇따라 일치를 선언합니다. 이 교회들은 에페소와 칼케돈 공의회 등에서 단죄된 이설들을 추종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동방 교회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1445년에 끝났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페라라에서 동·서방 교회 대표들 함께 공의회를 진행
연옥 교리·누룩없는 빵 사용·필리오케 등 타협접 찾아
독자적 세력 형성한 동방교회들과 잇따라 일치 선언
교황권 우위 선포, 공의회 우위설 따르는 이들은 파문 
 
 

 1431년 바젤에서 시작해 페라라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서 1445년에 폐회한 이 공의회를 가톨릭교회는 17번째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회를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또는 바젤-페라라-피렌체-로마 공의회라고도 부릅니다.

 이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동방 교회와 일치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일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로 돌아간 대표들이 사정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을뿐더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관계가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합 교령 `기뻐 환호하라, 하늘들아`는 동ㆍ서 교회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차이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마지막 대립 교황
 바젤 공의회의 소수파가 교황 에우제니오 4세 뜻을 따라 공의회 장소를 페라라로 옮겨간 후 바젤에 남은 다수파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유효한 공의회라고 주장하면서 회의를 계속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 됐습니다.

 그리하여 1439년 5월 △보편 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고 △교황은 임의로 공의회를 정회하거나 해산할 수 없으며 △이를 거부하는 이는 이단으로 단죄된다는 내용의 교령을 발표합니다. 한달 후에는 이 교령에 따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이단`으로 퇴위시키고 11월에는 서방 교회의 마지막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재위 1439~1449)를 선출합니다. 이로써 바젤은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분열된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도입한 공의회 우위설이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한편 동방 교회와 일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집중했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연합 교령을 통해 일치 문제를 일단락 짓자 즉각 바젤 다수파에 대응합니다. 교황은 1439년 11월 `하느님의 사람 모세`라는 칙서를 통해 콘스탄츠 공의회가 1415년에 발표한 공의회 우위설 인정 교령들을 무효로 선언하고, 바젤 다수파에게 해산을 명령합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1441년 4월에 칙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지라도`(Esti non dubitemus)를 발표, 교황권이 공의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포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따르는 이들을 이단으로 파문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처음에는 바젤에 다소 우호적이거나 중립적 태도를 보이던 유럽 세속 군주들도 교황 에우제니오 4세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다수파는 재정난에 허덕였고 1443년에는 대립 교황 펠릭스 5세가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옮겨갔습니다.

 1447년 2월 에우제니오 4세가 선종하고 니콜라오 5세(재위 1



가톨릭평화신문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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