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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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9> 19. 트리엔트 공의회(상)

프로테스탄트로 인한 분열 해결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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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년 12월 10일 , 교황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신부이자 독일 비텐베르크 신학대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대사의 오ㆍ남용과 그 폐해를 지적하는 95개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내걸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루터의 후배이자 동료 교수인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이 루터 사후에 쓴 저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루터는 95개 명제를 교회 문에 내건 것이 아니라 대사의 오ㆍ남용과 그 폐해를 지적하는 내용의 편지를 관할 대교구장인 알브레히트 대주교를 비롯한 일부 주교들과 몇몇 동료들에게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출판업자에게 전해져 이듬해 초에 `95개 명제`로 인쇄돼 독일 전역에 유포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성경만으로!` `신앙만으로!` `은총만으로!`를 외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이렇게 해서 시작됐습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회를 통해 루터에게 침묵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인 가예타노 추기경을 특사로 독일에 파견합니다. 여전히 주장을 굽히지 않는 루터를 가예타노 추기경이 교회 법정에 세우려고 하자 루터는 교황권을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독일 교회에 청원하며 몸을 피합니다.
 1520년 6월 교황 레오 10세는 교서를 발표, 루터가 제기한 41개 항의 명제를 단죄하면서 이를 60일 안에 취소할 것을 루터에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교황의 이런 요구는 루터에게는 물론이고 교황보다 공의회를 더 중시하던 당시 독일의 많은 이들에게 별 권위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루터는 그해 여름부터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배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같은 개혁 선언문들을 잇따라 발표합니다. 교회 폐해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교황권 자체와 전통 교리, 성사들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루터는 나아가 1520년 12월 비텐베르크의 엘스터 성문에서 교황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립니다. 이듬해 1월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미 루터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 아헨에서 대관식을 갖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착좌한 카를 5세는 1521년 독일 남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열어 루터 문제를 논의합니다만, 별 소득이 없이 끝납니다. 이어 1523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참석자들은 루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땅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1년 이내에 소집할 것을 교황에게 요구합니다.
 당시는 레오 10세의 후임 하드리아노 6세(재위 1522~1523)가 선종하고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교황좌에 착좌한 직후였습니다. 독일 제국의 영토에서 교황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의회를 소집하라는 요구에 대해 클레멘스 7세는 미적거렸습니다. 독일 땅에서 여는 공의회에 대해 카를 5세와 대립관계에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면 공의회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 것입니다. 게다가 독일 황제의 권한이 자꾸 커지는 것도 교황으로서는 탐탁지 않았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선종하고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가 후임 교황이 됐습니다. 독일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카를 5세 황제의 공의회 소집 요구는 바오로 3세에게도 계속 됐습니다. 다행이 바오로 3세 교황은 교회 개혁 열의를 갖고 있었고 공의회 소집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536년 카를 5세가 로마를 방문해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바오로 3세 교황은 승낙했습니다. 공의회 개최지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인 이탈리아 북부 만투아, 소집일은 1537년 5월 23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는 실패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만투아 영주가 공의회 경비대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며 교황에게 비용을 부담지웠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공의회 장소를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인 비첸차로 옮기도록 합니다. 하지만 교황 사절들이 비첸차에 도착했을 때 주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공의회는 무산되면서 독일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프로테스탄트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교회 분열을 치유하고자 시도합니다. 그것이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회의입니다. 하지만 레겐스부르크 회의 역시 실패합니다. 핵심 쟁점인 의화 문제에 대한 논의에 앞서 교회에 대한 개념부터 서로 달라서 대화가 진척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황제와 교황은 다시 한 번 공의회를 통한 사태 해결을 추진합니다. 이번에는 카를 5세 황제보다 바오로 3세 교황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이탈리아에까지 일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오로 3세는 카를 5세와 합의해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현재 트렌토)에서 공의회를 소집키로 합니다.
 하지만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카를 5세와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544년 9월 두 나라가 크레피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가 공의회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의회 개최 길이 다시 열립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44년 11월 칙서 「예루살렘아 기뻐하라」(Laetare Jerusalem)를 통해 1545년 3월 15일(사순 제4주일 `기뻐하라` 주일)에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합니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논의할 주요 안건 세 가지로 분열의 치유, 교회 개혁, 그리스도교 세계 평화 확보를 통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을 제시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 개최 3주전에 공의회를 주재할 교황 사절로 조반니 델 몬테, 마르첼로 체르비니, 레지널드 폴 세 추기경을 임명했습니다. 잉글랜드 출신의 폴 추기경은 영국 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가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려는 것을 질타해 헨리 8세의 미움을 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정일에 개막하지 못합니다. 참석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들이 공의회 참석을 거부하면서 방해했습니다. 교황과 황제는 군사 동맹을 맺고 프로테스탄트들의 방해를 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13일 마침내 공의회가 개막합니다. 이 공의회가 가톨릭교회에서 19번째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는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교회 분열의 치유라는 목적과는 다르게 프로테스탄트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반쪽만으로 공의회는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1141호(11월 13일자) 마지막 단락의 `



가톨릭평화신문  20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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