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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43> 20.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

새로운 사상들 만연에 교회, 교황권 지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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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186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는 회칙 「얼마나 큰 배려」(Quanta Cura)를 통해 당시 사상이나 주장 가운데 오류가 있다고 본 80가지를 발표합니다. `오류표` 혹은 `오류 목록`이라 부르는 이 80가지는 세속주의, 합리주의, 민족주의, 개인주의, 자연주의 같은 근대 사조들과 자유라는 이름 하에 정치ㆍ사회ㆍ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에서 빚어지는 오류들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끝나고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유럽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과학 발전과 계몽주의로 인한 근대 사상의 물결이 유럽을 출렁이게 했고, 이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연주의는 기계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 또는 범신론을 낳았습니다. 이성주의는 모든 것을 인간 이성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계시의 하느님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 가둬 버렸습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조는 신앙을 개인의 자유로 돌리면서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낳았습니다.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이런 흐름에서 태동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유럽 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성직계급인 제1신분과 왕실 및 귀족 계급인 제2신분이 누리던 특권은 사라졌습니다. 군주와 귀족 계급 대신에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통한 의회정치가 자리잡았습니다. 절대군주와 국민의회가 팽팽히 대립하거나 손을 잡았고,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위상은 추락해 갔습니다.
 프랑스 혁명 세력인 국민의회는 `성직자 공민 헌법`을 통해 교구를 행정 구역에 따라 재편하고 주교를 투표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불복하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수도원을 해산하고 동정서원을 못하게 했으며 혼인성사를 폐지하고 이혼을 자유화했습니다. 교회 재산과 교황령까지 몰수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복장까지 금지시켰습니다. 혁명의 이 여파는 다른 나라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와 함께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교황이나 교황청 간섭을 받지 않는 민족 교회 혹은 국가 교회 체제가 생겨났습니다.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교황 권위보다 지역 교회 독자성을 우위에 두는 사상(갈리아주의), 개별 주교는 교황보다 못하지만 전체로서 주교단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회를 대표하는 신자단과 교회 최고기관인 공의회가 교황의 군주적 체제를 대신해야 한다는 사상(페브로니우스주의)이 교회의 한쪽을 파고들었습니다.
 이에 맞서 교황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젊은 신부들과 평신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교황이 없는 가톨릭교회는 있을 수 없다면서 교황 중심의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내세웠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런 상황에서 오류표를 통해 당시 교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위험스러운 80가지 명제를 목록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오류표 발표일이 교황이 10년 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발표한 바로 그날이었다는 사실은 근대 사상의 위험에서부터 교회를 보호해 가톨릭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교황 의중을 엿보게 해줍니다.
 그런데 교황 비오 9세는 오류표를 발표하기 이틀 전에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경신성사성) 모임에 참석한 추기경 21명에게 공의회를 소집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추기경들의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반대한다거나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는 답변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이 찬성을 표시했습니다. 20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해서 태동하게 됐습니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열린 위원회 회의 모습.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공의회 준비
 교황은 이듬해인 1865년 3월 공의회 준비를 위해 교황청에 있는 추기경 5명으로 이뤄진 중앙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4월에는 주교 30~40명에게 공의회 계획과 관련해 자문을 구하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벨기에 영국 주교들까지 포함됐습니다. 이들도 전반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사상이나 주장들, 교회를 세속 국가 권력과 똑같이 보려는 그릇된 경향을 단죄하고 교회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권위와 교황 무류성에 대해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추기경들로 이뤄진 중앙준비위원회는 산하에 신앙교리, 교회와 국가 관계, 동방교회와 선교, 교회 규율, 수도회 등을 분담할 5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위원회에 의제와 관련한 초안을 마련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소위원회들은 당시 로마에 닥친 정치적 위기 상황으로 1867년 여름까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통일을 외치며 교황령인 로마를 침략하려는 이탈리아 공화국에 맞서 로마를 보호하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고 1866년에는 프로이센(독일 북부에 있던 왕국)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는 등 로마가 정치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교황 또한 공의회 개최 문제를 놓고 숙고를 거듭했습니다.
 프랑스 군이 이탈리아 공화국 군대의 침략을 물리치고 로마가 다시 안정을 찾으면서 1867년 6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 1800주년을 기념하고자 세계 각지에서 500명의 주교가 로마로 왔습니다. 교황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주교들에게 공의회 개최 계획을 발표합니다.
 다시 1년 후 교황 비오 9세는 공의회 소집 칙서 「영원하신 아버지」를 통해 1869년 12월 8일 로마 바티칸 바실리카(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교황은 이 칙서를 명의 주교(보좌 주교)를 포함한 모든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에게 발송했고, 이어 정교회 총주교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대표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의회에서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대표한다는 명시적 규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그러나 이전 공의회들과 달리 세속 군주들에게는 초청장을 발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의 5개 소위원회들은 의제로 다룰 초안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앙교리소위원회는 교황 무류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놓고 오래 연구했습니다. 찬반 양론이 엇갈렸습니다만 로마에서 발행되는 가톨릭 잡지 「라 치빌타 카톨리카」는 1869년 2월 모든 가톨릭신자들이 다가오는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이 정의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전에 다룰 내용과 방향까지 언론을 통해 노출돼 버린 것이었습니다.
 국가와 교회 관계도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만 해당 소위원회가 마련한 초안은 지나치게 과거 중세기적 개념에 치우쳐 있어서 별로 주목받



가톨릭평화신문  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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