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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부] 9. 공의회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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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구적 신학자들인 로마노 과르다니 신부(왼쪽부터). 앙리 드 뤼박 추기경, 이브 콩가르 추기경, 칼 라너 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모습과 신자 생활은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구원의 방주`라고 여기는 요새 속에서 폐쇄적이고 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체적 삶과는 무관하게 불변하는 진리를 일방적으로 고고하게 선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와 영향을 미쳤고 21세기인 오늘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격언이 의미하듯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또한 그 공의회에 이르는 길을 놓은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 교회에 대한 이해, 세상과 교회의 관계,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등은 이들 선구적 신학자들이 이룬 신학적 결실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공의회에 기여했지만 그들 가운데서 대표적 몇몇 신학자들의 이름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탐구하는 이 자리에 적합할 것입니다. 로마노 과르디니, 앙리 드 뤼박, 이브 콩가르, 칼 라너 같은 신학자들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주로 독일에서 활동한 과르디니(1885~1968) 신부는 하느님 계시와 교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전례 쇄신 등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계시를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대대로 전해져 오는 하느님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계시로 이해하던 당시 사조와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과르디니에게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인격적 만남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과르디니는 또 성찬례 거행에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런 꿈은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서 현실화했습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원인 앙리 드 뤼박(1896~1991)은 그의 `새로운 신학(新神學)`으로 한때 교회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추기경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스콜라신학(혹은 네오스콜라신학)의 이성 중심의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에서 탈피해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신학에 적용했습니다. 이를 통한 성경 주석과 초대 교회 교부들에 대한 연구는 그의 신학적 토대가 됐습니다. 드 뤼박은 특히 자연과 초자연(은총)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자연 세계와 은총 세계를 엄격히 구별했지만 그는 은총이 배제된 순수한 자연이란 없다면서 오히려 자연을 통한 초자연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원초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이런 관점은 무신론이나 타 종교와 대화의 길을 터놓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다른 프랑스 신학자 이브 콩가르(1904~1995)는 교회 쇄신, 교회 일치,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등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입니다. 당시 지배적 관념은 불변하는 진리를 지닌 교회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콩가르 신부는 `변화에 열려 있는 역사적으로 역동적인 교회관`을 강조했습니다. 마치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하듯이 인간들의 모임인 교회도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분열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종래의 가톨릭 옹호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또한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의 신원과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계적 위계 중심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평신도 역시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 곧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왕직과 예언자직에 참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의 눈에, 콩가르 신부의 이런 혁신적 신학사상은 위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등 여러 차례 교회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의 신학 고문으로 위촉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헌장, 계시헌장, 일치교령, 선교교령 등 여러 공의회 문헌 작성에 기여한 콩가르 신부는 90살 때인 1994년에 추기경에 임명됐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독일 출신 칼 라너(1904~1984)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전문위원으로 위촉됐으나 나중에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주류를 이어오던 스콜라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객관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라너에게 하느님은 인간이 이성으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보다 훨씬 크신 하느님은 거룩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곧 초월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이 하느님을 인간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서 체험합니다. 라너 신부는 특히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이 이론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구자들에게는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혁신적 사상으로 교회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다른 신학자들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 정당성을 입증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오해와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신학적 연구 작업을 멈추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랑에서 이들 선구적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현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문화 생활 양식 등 상황을 고려해 적합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쇄신과 적응, 개방과 대화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도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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