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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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0) 하느님 뜻과의 조화(34)

"하느님 중심" 필요할 때/ 나 중심이 강할수록 부조화·불공명 심해져, 영적 갈망 없으면 하느님 받아들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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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나” “돌아버리겠군” “지루해” “폭발해 버리겠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드시 앙갚음하고야 말겠어”

운전을 하다가, 혹은 마켓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 우리는 종종 짜증을 느낀다. 식사하다가 갑자기 화를 내고,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확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공부하다 책을 던진 경험, 길을 걸어가다 괜히 돌부리를 걷어찬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있다. 또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적지만, 과거에는 집안에서 비행접시를 날리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의 결핍에서 온다. 조화는 본질적으로 나와 너, 세상의 주고받는 상호 작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고받지 않고 나만 생각하면 조화는 불가능하다.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하면 강할수록 부조화, 불공명이 심해진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그런 삶이 불가능해진다.

인간은 몸과 정신과 마음으로 형성된 존재다.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몸에서는 충동이, 정신에서는 열망이, 마음에서는 영감과 갈망이 나온다. 열망과 충동이 강하면 초월적 차원의 영감과 갈망의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 육신과 정신이 강하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발한다. 육신과 정신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육신과 정신에 영적인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영적 갈망이 없으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느님은 평화 그 자체다. 따라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조화와 불공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영적인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낮은 차원의 에너지인 육신적 정신적 에너지가 넘친다. 하느님 안에서 육신과 정신을 써야 하는데 나 중심적으로 살다 보니 하느님은 저 멀리 던져져 있다. 이러면 나 중심적 삶만 살아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 중심적으로 살면 오히려 나 중심적 삶이 불가능해진다. 나를 발견하고 싶다면, 진정으로 나를 아낀다면 나 중심을 버려야 한다. 나 중심적 삶은 본질적으로 소외로 이어진다. 타인 중심, 하느님 중심이 아니기에 궁극에는 나 혼자 남게 된다. 외롭게 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의 모든 원인은 소외에 있다. 세상과 이웃이 나를 왕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과 이웃으로부터 왕따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삶은 불가능해”라고 좌절한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라고 나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구조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로,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 중심’이 필요하다 ‘나 중심’에서 라인을 새롭게 바꿔 타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의 입을 통해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2사무 7, 6)

이 말씀은 하느님은 집도 절도 없는 외로운 분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서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당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기에 어디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하느님은 1,000평, 1만 평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슈퍼마켓에 가면 하느님은 거기에 있다. 구둣방에 가면 그곳에 하느님이 있다. 수영장에 가도 하느님은 그곳에 있다. 2평 쪽방에도 하느님은 계신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느님이 계신다. 계약의 궤가 바로 우리의 몸이다.

어느 곳이나 계신 하느님을 내 몸 안에 모시면 신앙의 진수, 신앙의 핵심을 깨달을 수 있다. 신앙의 내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을 모시면 광대한 우주가 나에게 들어온다. 성경 구절 몇 개 외운다고 해서 신앙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적 성전이 건실히 지어져야 한다. 성당이 멋있게 지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멋있게 형성돼야 한다. 이발소에서, 슈퍼마켓에서, 음식점에서 성당을 지어야 한다.

목표는 하나다.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 주교님, 신부님 중심이 아니라 모두 함께 힘을 모아 하느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 중심이 필요하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힘든가. 자녀가 속을 썩이는가. 이웃의 모함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성당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가 신부님 수녀님으로부터 심한 상처를 입었는가. 하느님만 중심으로 삼는다면 남은 생애에 모든 것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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