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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타보르 산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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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지방 이즈르엘 평야에는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 인상적인 ‘타보르 산’이 있다. 주위가 다 보여서 ‘다볼 산’이라 할 만큼 전망이 좋다. 정상에 서면 세상을 모두 가진 것 같은 풍부함을 선사한다. 해발 588미터에 달하는 타보르 산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구약 시대에는 드보라가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꺾었고(판관 4-5장)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 타보르 산과 주변 이즈르엘 평야 전경.

사실 신약은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오르셨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저 ‘높은 산’이라고만 기록했을 뿐이다(마태 17 1 마르 9 2). 그러나 서기 4세기에 헬레나가 성전을 봉헌하고 7세기에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한 성당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 그전부터 타보르라는 전승이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헤르몬 산을 지목하는 의견도 있다. 변모(마태 17 1-9) 바로 전에 예수님이 카이사리아 필리피에 계셨기 때문이다(마태 16 13-20).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현재 골란 고원의 북서쪽 지방으로서 헤르몬 산과 무척 가깝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시고 베드로에게 수위(首位)권과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다(마태 16 17-19). 그리고 그로부터 ‘엿새 뒤’ 변모가 있었다(마태 17 1 마르 9 2). 그러나 타보르와 헤르몬 가운데 어디가 더 정확하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두 산 모두 주님의 위업을 드러내는 봉우리로서 시편 89 13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권위가 타보르와 헤르몬을 통해 나타난다고 찬양한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어 신성하신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심은 주님 부활과 재림에 대한 전조가 된다(2베드 1 16-18 참조). 곧 하늘 나라의 권능이(마태 16 28 마르 9 1 등) 주님 변모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 타보르 산 정상의 ‘변모 성전’.

주님의 변모는 또한 탈출기를 재현하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머무셨을 때 구름이 엿새 동안 그곳을 덮은 것처럼(탈출 24 16) 엿새 뒤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을 때 빛나는 구름이 그 위를 덮었다(마르 9 7). 하느님이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탈출 24 16) 예수님의 변모 때도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마르 9 7).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서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처럼(탈출 34 30)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빛나고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마르 9 3.6). 게다가 높은 산은 시나이 산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모세와 엘리야도 시나이(호렙) 산에 올랐었다(탈출 24 16 1열왕 19 11).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의 상징으로서 예수님의 구원까지 한 라인을 이어간다. 그리고 모세의 등장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일으킬 모세 같은 예언자’(신명 18 15)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뜻하며(사도 3 28) 엘리야는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리라’는 말(3 23)과 관련이 있다. 이 경이로운 모습에 압도된 베드로는 엉겁결에 초막을 짓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초막은 임금이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초막절’(즈카 14 16)을 떠올린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그런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 압도를 넘어 신성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두려워했던 것처럼(신명 5 24-26). 예수님의 변모를 목격함은 한낱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뵙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 전에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까닭은 아마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수난 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곧 약한 인간에게 미리 보여주신 하나의 끈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고 사실 그 기억 때문에 평생 동안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변모가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다. 비록 십자가형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으나(루카 22 54-62) 그가 다시 일어나 주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계기는 예수님 신성에 대한 확신 덕분이었을 것이다.

김명숙씨는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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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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