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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10) 한결 같은 태도

죽음의 수용소 향한 마지막 ‘선교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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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콜베 신부가 체포된 직후의 수도원 내부 모습. 교황 사진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고, 성모상은 목이 부러져 있다.



1936년 콜베 신부는 일본 선교에서 돌아온다. 일본 선교는 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각을 갖추고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심을 고취할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의 시간이었다. 그후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성모의 마을)에서 수사들의 양성과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역할이었다. 그는 지극한 겸손과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형제들을 보살폈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젊은 수사들에게 살아 있는 수도 생활의 교본 역할을 했다. 그는 수사들을 항상 ‘아들들’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르침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잠깐의 행복 끝에 온 시련

어쩌면 콜베 신부에게도 이 시기가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했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행복과 편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단 일주일 만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외곽까지 진출했고 폴란드군은 20여일 간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9월 28일 항복했다. 사실상 폴란드는 완전히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폴란드를 장악한 독일에게 콜베 신부는 굴복과 회유의 첫째 대상에 속했다. 그는 폴란드 내에서 이미 권위 있는 종교인일 뿐만 아니라 유력한 언론인이었기 때문이다. ‘성모 기사’ 회지는 이미 매달 100만 부 이상 발간되고 있었으며, 니에포칼라누프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사도직이 폴란드 내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1938년 ‘니에포칼라누프 라디오 방송국’까지 개국해 선교 활동에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성모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는 그 순간에 전쟁이라는 시험의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콜베 신부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성모님께 순종할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으며 매 순간 자신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전쟁이 가져오는 해악은 단순히 생명의 살상과 문명의 파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쟁은 인간에게 미움과 증오를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며, 올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악의 절정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비인간성의 상황에서도 과연 사랑과 용서가 한결같이 선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전쟁 앞에서 인간의 양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용서는 비겁하고 나약한 행위로 변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록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나약한 인간 육신의 한계에 갇힌 불쌍한 죄인일 뿐이다. 뺨을 맞고 목숨을 잃는 경우는 별로 없기에,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내미는 정도의 사랑과 용서라면 인간적인 인내심으로도 실천이 가능할지 모르나 자신의 생명을 놓고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생사가 오가는 전쟁 속에서 미움과 증오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오로지 준비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능력치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이토록 어려운 일임에도, 미움과 용서를 인간의 나약함으로 합리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명 이를 넘어선 모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콜베 신부가 그러했다. 전쟁 중에 독일군의 폭격은 밤낮없이 이어졌고 니에포칼라누프의 수사들은 모두 대피호로 피난했지만 콜베 신부는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한 수사가 “콜베 신부님은 마치 공포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라고 증언할 만큼, 그는 늘 침착했고 대담했으며 심지어는 명랑했다. 끊임없이 수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그들이 잠자리로 돌아간 이후에는 밤새 순시를 돌며 형제들의 안위와 상태를 살폈다.

9월 19일 독일군이 니에포칼라누프에 나타났다. 그들은 콜베 신부와 함께 서른여섯 명의 동료 수도자를 체포해 암티츠 수용소로 끌고 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지독한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독일군의 문초를 받아야만 했다. 물론 훗날 콜베 신부가 수용될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비교한다면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돼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었지만, 처음 겪어보는 독일군의 적대적 태도에 수사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그곳에서도 한결같은 이는 오로지 콜베 신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들이여, 용기를 내세요. 우리는 지금 ‘선교’를 하러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비까지 지불해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영혼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향해서 ‘우리들은 만족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립시다.”

물론 모든 수사들이 그와 같은 성인은 아니었기에,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두려웠던 수용소에서도 항상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사제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커다란 위로와 의지가 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었다. 상황이 고통스러웠기에 콜베 신부의 애덕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안으로는 수사들을 돌보고 위로하며 밖으로는 선교사로서 일을 했다. 그 삭막한 곳에서 독일군에게 미소를 지으며 기적의 메달을 나눠 주고 온유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본격적인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신부의 태도는 그들의 적대심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콜베 신부와 동료들은 원죄 없으신 성모 대축일인 12월 8일 모두 석방됐다. 그들은 자유를 되찾았지만 콜베 신부는 다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니에포칼라누프로 돌아온 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기도와 성체조배에 몰두했다. 전쟁이 몰고 온 미움과 증오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물리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첫번째 수용소 체험을 통해 배웠다. 그에게는 성모님을 위한 보다 완전한 승리가 필요했으며, 그 승리는 바로 어떠한 경우라도 사랑은 부정될 수 없다는 사실의 증명이었다.

콜베 신부의 예상대로 1941년 2월 17일 그는 4명의 형제와 함께 2차로 체포됐고, 같은 해 5월 28일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첫 번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시 니에포칼라누프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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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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