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초대교회 신자들의 성찬 전례 이해

[월간 꿈 CUM] 교리 _ 성체성사, 그 신비 속으로 (3)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성체 기적 경당 프레스코화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이는 초기 교부들의 증언을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간략하게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찬 전례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보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가현론자(Docetists)들을 가리켜 “성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찬례와 기도를 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평하였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비오 황제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을 설명하면서 그 바탕의 핵심이 성체성사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성찬의 모임에서 축성하는 빵과 포도주를 보통의 빵과 포도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이 하신 감사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우리를 그분의 몸과 동화시켜 양육시키는 음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과 실제성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우리의 육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빵과 그의 피인 성작으로써 양육되기 때문에 차후의 육신 부활도 가능함을 내다보는 추론을 하였다. 히뽈리투스는 “세례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그 안에서 취해지는 것은 바로 신자들이 믿고 있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성 치프리아누스는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에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실에 대하여 개탄한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그들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기도 전에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배령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손과 입으로 범하는 죄악은 더 큰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부인했을 때보다도 더욱 더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사제가 축성한 제병을 신자들의 손 위에 얹어 놓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옮겨 영했던 것이며, 치프리아누스가 성찬례에서 그리스도가 상징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었다면 이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의 실재주의는 성체에 관한 교부들의 입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빵을 놓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누가 감히 그것을 의심할 수 있는가? 또 주님께서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누가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과거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던 적이 있다. 이것은 곧 피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이 포도주를 피로 변화시킨다고 말할 때에도 이를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임을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마음에 새기는 바이다. 왜냐하면 빵의 형상 아래 그 몸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 피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취할 때는 우리는 바로 그 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한결같이 성찬례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생활하였으며 또한 성찬의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눌 때 그것이 확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임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명백히 주님의 몸과 피임을 인식하며 이 예를 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은 다음, 병자들에게 가져가기 위해서 따로 보관해 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이며, 그 안에는 살아계신 주님께서 현존하여 계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실히 그러한 믿음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생동감 있는 교회 생활을 영위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세기 전반에 걸쳐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성체에 관하여 가장 깊은 흥미를 가진 문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체 안에 현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특별히 이 문제 즉 성체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성찬례를 늘 거행하여 왔고 신자들은 너무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와서 교회의 몇몇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정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납득할만한 해명을 구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투르의 베렌가리우스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일단 부정해 놓고 그것이 과연 이성적으로 타당한 것이냐를 연구한 것이다. 그 결과 베렌가리우스는 사물의 외관과 실체를 동일시하고 감각에 의하여 직접 실체가 인식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성체에 있어서 감각적으로는 빵과 포도주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베렌가리우스는 성체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을 낸 지 얼마 안 되어 교회의 여러 주교 학자 등으로부터 맹렬한 논박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베렌가리우스는 1079년 로마에서 전통 신앙관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함으로써 이 사건은 종결된다. 


글 _ 전합수 신부 (가브리엘,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주임)
1992년 사제수품.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한국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수원교구 청소년국 청년성서부 초대 전담신부, 수원교구 하남, 본오동, 오전동, 송서, 매교동본당 주임을 지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4-1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30

1코린 1장 25절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