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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1) 7세기 ② - 고백자 막시무스의 영성

혀와 손목 잘려도 신념 굽히지 않은 정통 교리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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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시무스의 여정을 담은 성화.



7세기에 동방 교회에서 요한 클리마쿠스(Ioannes Climacus, 575쯤~650)와 동시대인으로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Confessor, 580쯤~662)가 있었습니다. 물론 동시대라고는 하지만 시나이 산에서 거의 평생 은수 생활을 실천했던 요한 클리마쿠스와는 달리 막시무스는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나 7세기에 발생했던 그리스도론 교의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스도론 이단 논쟁에 뛰어든 수도자 막시무스

막시무스에 대한 부정적인 사료에 의하면, 그는 사마리아인 상인 아버지와 페르시아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열 살가량 됐을 때에 막시무스는 예루살렘 수도원에 입회해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연구했습니다. 막시무스는 614년쯤 페르시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소아시아 서북부에 위치한 키지코스(Cyzikos)로 이주해 비잔틴 제국 황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긍정적인 사료에 의하면, 막시무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을 잘 받았던 막시무스는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Heraclius, 재위 610~641)가 황제로 즉위한 얼마 후에 그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614년쯤 막시무스는 관직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 근교 크리소폴리스(Chrisopolis)에 위치한 필리피코스(Philippikos)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얼마 후에 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25년 막시무스는 제자 아나스타시우스와 함께 키지코스로 이주했습니다.

한편 611~617년 사이에 안티오키아, 팔레스티나,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626년 소아시아를 침공하자 키지코스에 이주했던 막시무스는 또다시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을 경유해 북아프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막시무스는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돼 신성만 남았다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과 관련된 새로운 이단인 그리스도에게 신적 활동만 있다는 단활설(單活說, Monoenergism)과 그리스도에게 신적 의지만 있다는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을 접했으며, 641년부터 이단 척결을 위한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극형을 마다치 않고 정통 교리를 수호한 고백자 막시무스

649년 교황 마르티누스 1세(Martinus PP. I, 재임 649~653/55)는 라테라노 교회회의를 소집해 막시무스의 도움으로 단활설과 단의설을 단죄했습니다. 하지만 이단설을 지지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재위 641~668)는 653년 교황 마르티누스와 막시무스를 체포해 대역죄 혐의로 재판을 했으며, 655년 막시무스를 트라키아(Thracia) 지역의 비지아(Byzya)로 추방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막시무스가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치자, 황제 콘스탄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해 다시 재판을 받게 하고 막시무스에게 혀와 오른손을 자르는 형을 가했습니다. 비잔틴 황제는 막시무스를 흑해 동쪽 연안 캅카스 산맥 아래 라지카(Lazica)로 추방했고, 662년 막시무스는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순교는 아니지만, 막시무스는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극형을 받아 병사했기 때문에, 훗날 교회는 그를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뜻에서 고백자로 불렀습니다.

그의 굴곡진 경험 때문인지, 막시무스는 성경 주석, 교의 신학, 성사론, 전례, 금욕 생활과 신비 생활을 포함한 영성 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작품 90여 편을 남겼습니다. 막시무스의 영성 작품들 중에서 대표적인 몇 편은 18세기 후반에 거룩한 산의 니코데무스(Nicodemus the Hagiorite, 1749~1809)와 코린토의 마카리우스(Macarius of Corinth, 1731~1805)가 4~15세기 수도자들의 금언들을 수집해서 출판한 「필로칼리아(Philokalia)」 제2권에 수록돼 있습니다.



고대 동방 신비신학에 정통했던 중세 동방 신비신학자 막시무스

「필로칼리아」에 실린 글 중에 첫 번째는 626년 카지코스에서 저술된 「사랑에 대한 400편(400 Capita de Caritate)」입니다. 막시무스는 서문에서 과거 교부들의 저서 중에서 사랑에 대한 언급들을 모아 4복음서를 모방하여 100편씩 4권으로 묶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인간 영혼이 선하게 되기 위해 인간은 세상일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복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악습을 끊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몸으로 실천하는 덕행과 기도 속에 실천하는 덕행을 구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630~634년 사이 북아프리카에서 저술했다고 추정되는 「신학과 섭리의 200편(200 Capita Theologica et Oeconomica)」입니다. 막시무스는 오리게네스, 에바그리우스,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적인 가르침을 섭렵해 종합하고, 역시 100편씩 2권으로 묶었습니다. 세 번째는 「신학과 특별한 경륜에 대한 500편(500 Diversa Capita ad Theologiam et Oeconomiam spectantia)」입니다. 다만 「필로칼리아」의 편집자는 500편을 막시무스의 다른 작품에서 발췌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에서 발췌해서 묶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편집자가 발췌한 막시무스의 다른 작품인 「탈라시우스에게 질문(Quaestiones ad Thalassium)」과 「암비구아(Ambiguorum liber)」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628~630년 사이에 저술된 「주님의 기도에 대한 짧은 해설(Orationis Dominicae brevis expositio)」입니다.

막시무스 영성 작품 중에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노(老)수도자와 젊은이가 수도 생활 규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대화체 글인 「수덕서(Liber asceticus)」입니다. 이 작품에서 젊은이는 구원과 계명에 대한 질문을 하고, 노수도자는 세속적인 것들을 포기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계명의 요약은 사랑이기 때문에, 탐욕을 포기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분노를 억제하고, 스스로 욕심을 이겨야 하며, 기도를 통해 모든 생각에서 자유롭게 되어 선행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막시무스는 또 「신비 안내서(Mystagogia)」에서 성찬의 전례를 신비적인 관점에서 주석하고 묵상했습니다. 전례의 신비적인 의미를 밝힌 이 작품은 훗날 여러 차례 인쇄되며 사람들에게 읽혔습니다.

▲ 막시무스의 여정을 담은 성화.



막시무스는 고대 동방 교회 신비신학자들을 연구한 중세 동방 교회 신비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수도자로서 금욕 생활과 수덕 생활도 가르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수도 생활도 강조했습니다. 9세기경 요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막시무스의 작품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면서, 그의 작품은 서방 교회 신비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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