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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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어떻게 소비하고 있나요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8. 사진 한 장, 영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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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적인 영상에 익숙한 나머지 끔찍한 재난 소식도 습관처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은 강진이 발생한 튀르키예에서 한 아버지가 건물에 깔려 숨진 딸의 손을 무표정한 채 잡고 있는 모습. 페이스북 캡처



우리는 매일 눈을 뜨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장면을 본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밥을 먹으며, 그리고 킥킥 웃고 떠들면서 텔레비전이나 온라인을 통해 잔혹한 재난의 현장을 마주한다.

얼마 전 고속버스터미널 대기실에 들어섰다. 곳곳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강진으로 통곡의 땅이 된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참혹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어떤 이는 힐끗 쳐다보고 지나쳤고 또 누군가는 잠깐 인상 한 번 찡그리곤 바로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난 재난 영상이지만 사람들은 평온했다. 나 역시 내 갈 길을 갔고, 가족과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타인의 고통 앞에 이렇게 무딜 수가 있나? 끔찍한 재난 영상에 익숙한 탓일까? 요즘 우리는 잔혹하고 비참한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강진 현장을 매일 본다. 보면서 잠깐 한숨짓고 안타까워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 그렇게 빠르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마치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의 막이 끝난 것처럼 말이다.

철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우리는 먼 나라가 지진으로 수억만 사람들이 죽는다고 해도 잠을 잘 잘 수 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자신의 손가락 하나가 당장 잘라나가야 한다면 절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통에 대한 공감은 오직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공감은 타인의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의 감각을 떠올리면서 같은 사람이 되어보는 체험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감은 보이는 것을 보는 신체의 눈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단다.

어쩌면 현실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은 리얼한 영상보다 정지된 사진 한 장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영상은 생생하게 고스란히 다 보여주기에 나의 어떤 노력 없이 수동적으로 보게 한다. 안락한 소파에 누워 무언가 먹으면서 생각 없이 본다. 영상은 생방송으로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하고 프레임 안과 밖을 생생하게 누비며 보여주는 만큼 그냥 보면 된다.

하지만 한순간을 포착한 정지된 사진은 상상을 하게 한다. 사진의 시간은 과거이고 프레임에 갇힌 그 장면만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현재와 미래, 프레임 안과 밖의 관계를 수시로 드나드는 상상으로 마음의 눈을 열게 한다.

전 세계인을 울린 온라인상을 뜨겁게 달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잠자다가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진 딸, 이 잔해 밖으로 튀어나온 딸의 손, 그 손을 움켜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숨진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사진 속 아버지의 무표정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상상하게 한다. 무덤덤한 듯, 체념한 듯, 망연자실한 듯 그러면서도 초연한 느낌도 준다. 목 놓아 우는 모습보다 더 고통스럽고 슬픈 얼굴이다. 상상은 딸을 잃은 그 사람의 감각으로 그 사람의 처지에서 경험하게 해준다. 사진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언어다. 사진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상상하게 하고 그 상상은 공감의 문을 열어준다.

움직이는 영상은 재미있다. 빠르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은 생각할 틈도 여백도 없다. 더욱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끔찍한 실제 현장을 보아도 돌아서면 금방 잊는 이유다. 오늘날처럼 우리의 눈이 혹사당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린 매일 보고 또 본다. 넘쳐나는 폭력적인 영상에 익숙해 끔찍한 재난뉴스도 습관처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나은 나로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상상이 아닐까 싶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나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공감은 마음의 눈과 상상력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선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고스란히 다 보여주기에 상상하지 않는 영상매체에서 잠시 벗어나 정지된 이미지를 바라봐요. 호흡을 천천히 깊이 내 쉬면서 단 한 장의 장면에 머물러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프레임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고 상상력을 동원해요. 상상은 공감의 길을 열어주고 공감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면서 행복감을 줍니다. 사진뿐만 아니라 정지된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감수성과 상상력이 새싹처럼 자라리라 믿습니다.

꽃 한 송이, 돌멩이 한 개, 흙 한 줌에서 생명의 활력을 느끼면서 태초에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김용은 수녀(살레시오수녀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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