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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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36. 예수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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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잣집 아들, 루벤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게 되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력을 잃은 아들에게 책이라도 읽어주도록 여자들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루벤은 고용된 여자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물건까지 집어던집니다. 아무도 그의 성질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고용된 마리라는 여자는 보통이 아닙니다. 그녀는 무력으로 성질 더러운 부잣집 도련님을 제압하고 끝내 자신이 읽어주는 책을 듣게 만듭니다.

마리는 괴팍하게 생긴 모습으로 태어나 부모에게까지 학대받으며 살아온 나이 많은 상처투성이 여자였습니다. 루벤은 조금씩 마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마리도 루벤이 싫지 않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루벤은 아름다운 마리를 상상합니다.

그런데 의학기술의 발달로 루벤이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 전날 마리는 루벤을 떠납니다. 젊고 잘생기고 부잣집 외아들인 그가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고 계속 사랑할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회복된 루벤은 마리가 자주 읽어주던 안데르센 동화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갑니다. 때마침 마리도 그 곳에 있었습니다. 루벤은 마리를 본 적이 없지만 체취로 단번에 마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집으로 가요”라고 말합니다. 마리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이 예쁜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루벤은 “예뻐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리는 믿지 않습니다. 마리는 루벤을 뿌리치고 또 도망칩니다.

루벤은 어떻게 하면 마리가 자신의 사랑을 믿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는 정원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두 개의 고드름을 잘라 자신의 눈을 찌릅니다. 그리고 정원 의자에 앉아 마리를 기다립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마리가 곧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2007)의 줄거리입니다.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으로 아담을 쫓아낸다면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이 쫓겨난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으니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두려워 숨는 사람과는 관계가 안 이루어집니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 ‘자비’를 믿게 할지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눈과도 같은 아드님을 인간이 지은 죄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면 인간이 당신 자비를 믿고 당신께 다가올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마리가 루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를 보며 루벤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을 수 있듯,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죄가 사해졌음을 믿고 다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명’을 띠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통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신원)과 ‘사명’을 동시에 나타냅니다.(430항 참조) 신원과 사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세례 때 새로운 이름을 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명을 부를 때, 그 대상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불러준다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이름은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 탄생 예고 때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은 당신의 소명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고 이 소명을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원죄의 속박 속에서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주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주시어 죄가 사해졌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인간의 죄를 사해주게 하신 것입니다.(로마 3,25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우리가 더 이상 죄책감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433항 참조)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교회 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잔 다르크 성녀도 그랬듯이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오직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둡니다.(435항 참조) 우리도 예수의 이름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합니다.(마태 12,21 참조)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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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9-0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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