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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교회 자립 이끈 목자… 대전교구 도약의 전기 마련

제3대 대전교구장 고 경갑룡 주교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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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선종한 제3대 대전교구장 경갑룡(요셉) 주교는 내포교회의 자립을 이끈 목자였다. 원조받던 교회를 재정 자립을 통해 선교하는 교회, 나누는 공동체로 이끌었고, 지역 복음화의 기틀을 닦았으며, 해외 선교로까지 나아갔다.

경 주교가 교구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21년, 그가 교구를 이끄는 동안 내포교회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1984년 7월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그해 10월 말 교구 사제인사와 함께 교구 조직을 개편했다. 부교구장 제도를 없애고 사무처장으로 대체했으며, 교육국과 홍보국을 신설, 사무처와 사목국ㆍ교육국ㆍ관리국ㆍ홍보국 등 1처 4국 체제를 마련했고, 교구 사제 인사 원칙도 만들었다. 또한, 교구 재정 자립에 나서 더는 해외원조를 받지 않기로 하고 ‘본당 교납금 제도’를 정착시켰다. 사제들이 자신의 재능에 따라 봉사하도록 교구에 각종 위원회를 뒀고, 1989년 대전직할시(현 광역시) 승격과 신도시 건설 등으로 관할 지역에 인구 유입이 늘자 본당을 대거 신설했으며, 소외된 농촌 지역의 사목을 활성화하고자 ‘공소 지도자 학교’를 개설했다.



대전가톨릭대 설립 등 성소 계발에 역점

그가 가장 역점을 뒀던 사목 가운데 하나는 성소 계발과 육성으로, 1993년에는 대전가톨릭대를 설립, 교구 사제 양성에 전기를 마련했고, 몽골 등지에 해외 선교사제를 파견했다. 이어 2001년 7월 대전가톨릭대 들머리에 ‘정하상교육회관’을 세우고 ‘본당 봉사자학교’를 만들어 평신도 양성에 힘썼다. 2000년 12월 대전평화방송(현 대전가톨릭평화방송) FM을 개국, 충청권역에 전파를 통한 복음화의 장을 열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고자 2002년 주교 수품 25주년 기념 축하금으로 ‘성가정 생명장학금’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특히 1997년 말 우리나라가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대전교구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교구 쇄신에 힘썼다. 1998년 교구 쇄신 지침서를 발간, 지구장 제도를 강화하고, 교구 조직을 개편하고 일신했으며, 「대전교구 사목지침서」를 편찬하고, 특수사목 분야 증설을 단행했다. 이처럼 교구 쇄신에 중점을 둔 그의 사목은 2005년 퇴임 때까지 계속됐다.

이처럼 왕성한 사목을 통해 경 주교가 3대 교구장에 착좌할 당시 53개 본당에 사제 수 102명, 신자 수 9만여 명에 그쳤던 대전교구는 2004년 말 퇴임 당시 107개 본당에 사제 수 236명, 신자 수 21만 9000여 명으로 두 배 이상 성장했다.



1984년 교황 방한과 103위 시성식 총괄

‘내포교회의 목자’로 황금기를 만든 경 주교는 1930년 3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중동고를 거쳐 1951년 9월 육군에 입대했고, 1956년 5월 포병 대위로 전역했다. 4년 9개월간 전쟁의 참상을 체험하며 성소를 느낀 그는 제대를 2개월 앞둔 1956년 3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에 입학했고, 1962년 12월 21일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첫 소임은 명동본당 보좌였다. 당시 명동본당 주임이 2대 대전교구장 주교로 착좌하는 황민성(베드로) 신부였으니, 그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1965년 교구 재경부 차장을 겸직했고, 1967년 교구 재경부 국장으로 있으면서 금호동본당 주임을 겸했다. 이어 성모병원 경리처장, 청량리본당 보좌를 역임한 뒤 1971년 해외유학을 떠나 4년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상담학을, 1년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수학했고, 9개월간 필리핀 동아시아사목연구소(EAPI)에서 사목 연수도 했다. 귀국 뒤 서울 논현동본당 주임을 지내던 중 1977년 2월 서울대교구 보좌 겸 부파다(Buffada) 명의 주교로 임명됐다. 교구 총대리 주교로 있으면서 명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고, 1981년 11월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주교위원회에서 기념행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과 103위 시성식을 총괄했다. 8년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하던 경 주교는 1984년 7월 전임 황민성 주교 선종으로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대전교구 교구장에 임명돼 내포 복음화에 투신했다.



군종교구 설립에 결정적 역할

경 주교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1985년 1월 한국 천주교 군종신부단 총재를 맡아 군종교구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86년 10월 한국 주교회의에서 ‘군인 사목에 대한 교황헌장’의 정신에 따라 군종교구 설립을 의결하자 그해 11월께 주교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 군종교구 설정 요청서를 제출했고, 이어 1988년 한 차례 수정을 거친 한국 군종교구 정관안은 인류복음화성에 송부돼 1989년 10월 한국 교회에 군종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른다.

2005년 은퇴한 경 주교는 금산 지방리 공동사제관에 살았다. 후임 교구장 요청에 따라 1년가량 견진성사를 다니기도 했고, 대전가톨릭대 연구과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였다. 2015년 12월 말 노환으로 쓰러져 만 5년간 기나긴 투병을 해야 했다.



‘아버지처럼 엄했지만, 정이 많았던’ 목자

교구 원로사목자 윤주병 신부는 그를 ‘아버지처럼 엄했지만, 정이 많았던’ 목자로 기억했다.

“존경하는 주교님이셨는데, 새벽에 선종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겉만 보면 엄격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이었지만, 가까이하면 그분만큼 서민적이고 인자하신 분도 없었지요. 교구 인사와 행정, 재정 등 기틀을 견고히 세웠고, 통솔력이 뛰어나셨고, 어려웠던 교구를 자립하게끔 이끈 리더십도 빼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리도 싫어했던 연명치료를 받다가 떠나셨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어요. 돌아가신 건 슬프기 짝이 없지만, 병석에 계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품에서 영면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사진=가톨릭평화신문 DB, 대전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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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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