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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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평화칼럼] 그 순간 깃들던

이소영 베로니카(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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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성당이란 데에 가본 건 열두 살 때다. 아버지의 직장 업무로 인해 해외에 몇 해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 지역 재외국민 상당수는 한인교회나 성당 중에 한 군데를 다녔다. 여기엔 종교적 이유만이 아닌 사교 목적과 일상생활의 필요도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아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라 한국 잡지나 소설, 드라마 녹화 테이프 등 주요 유통망이 교민 종교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 그 한인성당은 규모가 작았고 가난했다. 처음엔 지하실 한 칸을, 나중엔 유치원 부속성당을 빌려 썼다. 제대 앞쪽이 협소하여 영성체 때 신부님이 의자 사이로 다니며 성체를 나눠주시곤 했다. 그곳의 습기 냄새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왠지 아늑하게 느껴졌다. 신부님은 루뱅이란 소도시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주일이면 기차 타고 브뤼셀로 와서 미사를 집전하셨다. 야윈 얼굴에 안경 너머로 소년처럼 눈이 반짝반짝했다. 나는 신부님이 좋았다. 여러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신부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단박에 구분할 수 있었다. 복도 저편에 까만 수단 자락이 펄럭이면 작은 심장이 옷섶 안에서 콩콩 뛰었다. 비록 ‘루카’와 ‘누가’를 별개 인물로 알던 무지한 꼬마였지만, 신부님의 강론이 ‘오늘의 명상’ 시간에 듣던 설교들과는 결이 다름을, 성경의 행간을 섬세하게 읽어내어 해석한 것임을 느꼈다. 내가 다른 누가 아닌 나여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여서 기뻤다.

중학교 올라가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 들어가 냉담하고, 대학원 다니며 다시금 성당에 가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십수 년 전 한겨울 아침이었지 싶다. 우연한 계기로 듣게 되었다. 신부님이 많이 아프시다고. “아직 젊은 분인데. 어쩌면 며칠을 넘기기 힘들지 모른대.” 학교 가서 종일 신부님 생각을 했다. 저녁 세미나 마치자마자 뛰어 나와 묵주 챙겨서 택시 타고 명동대성당으로 향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하나였고, 그 하나만큼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늦은 밤, 귀가하여 부음을 들었다.

열세 살 무렵 어느 주일엔가 성당에 가니 웬 초면의 외국인 신부님이 미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어른들이 소곤거리기로, 우리 신부님은 수술받으러 한국에 가셨다는 거다. 심각한 병세는 아니라 했지만 내 마음은 쨍그랑 깨졌다. 게다가 중고등부 언니들이 어디서 들었는지 “유학 나온 신부님은 원래 한번 귀국하면 다시 못 나오게 되어 있어. 교구에서 안 보내준대”라는 게 아닌가? 난 성모상 뒤에 숨어 엉엉 울며 “마리아님, 우리 신부님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저 하느님 안 믿을래요”라며 협박조의 생떼를 부렸다. 그리고 신부님은 달포 지나 참말로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신부님의 선종 시각은 내가 명동대성당에 들어서던 그 시각이었다. 세상 ‘안’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던 무렵 이미 신부님은 세상 너머에 계셨던 거다. 그런데도 왜 기도하는 내내 슬픈 직감 대신 안도감을 느꼈을까. 캄캄한 겨울밤, 성당 안에 감돌던 불가해한 온기는 무엇이었을까. 바보처럼 난 ‘신부님 깨어나셨나 보다’ 좋아했더랬다. 어릴 적 그랬듯 이번에도 기도대로 해주셨구나 하고. 나는 영성이 둔하고 얕아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믿고 싶었다. 그 순간 깃들던 설명 못 할 평온함은 신부님이 천상에서 그분 품에 곧바로 폭 안겼다는 징표라고.

이영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고단했을 유학 시절 중 만난 말수 적고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던 열세 살 여자아이를 기억하실 리 없겠지만, 천상 일은 사람 생각과 다르다고들 하니 소망해본다. 신부님을 위해 성모님께 협박 섞인 청을 드렸던 그 꼬마가 세상에 좋은 쓰임을 가진 어른으로 살아가도록 이번엔 신부님 쪽에서 날 위해 기도해 주시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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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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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22장 40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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