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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0. 평양교구 대신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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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하고도 멋스럽게 단층 기와집으로 지은 대신리성당(왼쪽)이 자리를 잡고, 본당 부설 동평학교 건물(오른쪽)은 성당에 잇닿아 있다. 성당 앞마당에는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옹기종기 둘러서 있고, 학생들은 교사(校舍) 앞에서 놀고 있다.

 1934년 2월 15일 평양본당(훗날 관후리주교좌본당)에 이어 평양시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돼 평양시 대동강 동쪽 선교리 일대와 평남 대동군과 강동군 일부 7개 공소를 관할하던 대신리성당 구내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처음에는 선교리본당, 신리본당으로 부르다가 194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 강제적으로 `리(里)`를 `마치(町)`로 바꾸면서 대신마치(大新町)본당으로 개칭했으나 해방 뒤 다시 행정구역 명칭을 `리`로 바꿔 대신리본당으로 재차 개칭했다.

 평양교구 사상 첫 한국인 사제인 양기섭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기도 했던 대신리본당은 평양시 외곽 지역으로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동평양 일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영신적 못자리였다. 관후리주교좌본당 보좌를 거쳐 막 부임한 젊고 패기만만한 양 신부를 목자로 한 선교리본당 신자들은 본당 설정 7개월 만인 1934년 9월 새 성당 축복식을 거행할 정도로 열의에 차 있었다.

 동평양 일대는 특히 가난한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 본당 공동체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양로원과 보육원을 개설해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936년 4월엔 일제 조선총독부 학무국 인가를 받아 6년제 초등교육기관인 동평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엔 13개 학급에 1000여 명이 면학하는 학교로 성장시킨다. 2대 패트릭 더피 신부에 이어 김필현ㆍ조인원 신부가 부임, 본당을 키웠으나 해방 뒤 공산정권에 동평학교와 관후리본당에서 관할하던 성모학교가 몰수되는 등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어 1949년 12월 7일 5대 주임 박용옥 신부가 공산정권에 피랍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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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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