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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1. 평양교구 관후리 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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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평양에 두 번째 본당인 대신리본당이 신설되기까지 `평양대성당`으로 더 오래 불린 평양교구 관후리주교좌성당이다. 왼쪽이 성모학교다. 사제관은 이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다. 장대현(將台峴)에 세워진 그림 같이 아름다운 벽돌 성당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인다.

 `관서지방의 중심` 평양에 복음이 전해진 건 1863년께다. 전교사 김기호(요한)와 이득보(마태오) 등이 복음을 전했고,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 또한 평양을 순회하며 전교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래도 평양 교세는 지극히 미약해 1896년 평양본당 설정 당시만 해도 천주교인을 동학당(천도교인) 혹은 마리아교인으로 부를 정도였다. 오히려 1890년에 들어온 개신교가 적극적 선교활동을 통해 교세를 넓혀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전교가 활발했다.

 하지만 평양본당 설정에 이어 1898년 착공한 성당이 1900년 완공돼 봉헌식이 거행되면서 가톨릭 선교에 전기가 마련됐다. 특히 1905년에 세운 초등교육기관 기명학교, 그리고 이듬해 세운 성모여학교로 인해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27년 3월 17일 평안남ㆍ북도를 관할하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되면서 평양성당은 지목구 중심 성당으로서 새 역사의 장을 연다.

 1943년 제5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착좌하면서 관후리성당은 주교좌성당이 된다. 그렇지만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년 말 관후리성당은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는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는다. 해방 뒤 되찾았지만 성당은 물론 사제관도 일부 헐렸다. 이에 1946년 8월 새로 신축에 들어가 전 교구민의 노력 봉사로 점차 본 모습을 드러냈지만 1948년 10월께 성모학교가, 이듬해인 1949년 12월 성당이 평양시 인민위원회에 각각 몰수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만다. 1950년 10월 평양 수복 직후 교회의 손에 돌아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빼앗겼고 전쟁 중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그 터전에는 평양소년학생궁전 등이 지어졌고, 성당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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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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