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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2. 평양교구 중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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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야 평양시와 합쳐졌지만, 평남 중화군은 `평양교구 신앙의 못자리`였다. 성직자들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거봉을 배출했다. 성직자로는 지학순(초대 원주교구장) 주교를 비롯해 김진하ㆍ유봉준(이상 서울대교구)ㆍ김광혁(청주교구) 신부 등을 냈고, 평신도 정치인으로는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운석(雲石)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를 냈다.

 이처럼 화려한 신앙의 못자리가 된 데는 1850년대에 직접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전교했던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를 보좌한 김기호(요한)가 당시 중화 지방에 공동체(훗날 목재리공소)를 이룬 것이 밑바탕이 됐다.

 이때부터 중화 지방은 가톨릭교회가 평안도에 진출하는 데 일종의 관문 역할을 했고, 특히 목재리공소(영진공소라고도 불림) 공동체에선 병인박해 당시 윤 베드로와 이 마태오, 윤 바오로 등이 혹형을 당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까지 선교의 뿌리가 된 중화인 윤창혁(비오)의 역할도 지대했다. 1914년 일시 사리원본당 관할 공소로 있다가 1919년 진남포본당이 사목관할권을 갖게 됐고 평양지목구 설정 6개월 뒤인 1927년 9월 본당으로 설정된다.

 중화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34년 11월이었다. 본당 설립과 함께 3300여㎡(1000여 평) 성당 부지를 확보한 공동체는 1932년 2대 주임 발터 콜만 신부가 성당 신축에 들어가 2년 뒤 500여 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당을 신축한다. 성당 전면부 왼쪽에 종탑을 세운 점도 특이하다.

 중화본당 공동체는 교구 내 가톨릭운동연맹 지회를 조직해 문맹 퇴치와 주일학교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성심유치원도 세워 유아교육에도 헌신했다. 이 공동체 역시 평양교구 주교관에서 요양을 하던 장두봉 신부가 일시 사목을 맡았다가 1949년 12월 12일 체포된 뒤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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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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