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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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페루(상) 괴로움으로 부르던 바빌론 강가의 다짐(시편 136)

박재식 신부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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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조정래 작가가 쓴 장편소설 「한강」을 읽었다. 문득 40여 년 전 어린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난, 산업화, 희생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지금 페루 현실과 흡사해 더 마음이 아팠는지도 모른다.

 교구장 주교님, 여러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신자들 도움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선교사로 살아 온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해외선교와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바라며 편지를 쓴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선교지에서 겪었던 갈등과 고난을 이야기하려 한다.


 
▲ 처음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을 다해 이들을 사랑해보자고 결심했다.
사진은 현지 주밎을과 어울리고 있는 필자(오른쪽).
 
 
 #`준비된 선교사`는 없다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남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97년 사제품을 받은 나는 2001년부터 교구장 주교님께 해외선교를 간곡히 청했다. 마침내 2년 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지원사제로 페루에 파견되면서 자칭 `준비된 선교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리마에 도착하는 순간, 준비된 선교사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떼처럼 달려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옷을 잡아당기는 검고 지저분한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도움을 청하려 전화를 해도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본부 주소도 제대로 몰랐다. 정말 사막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나마 하느님 도움으로 웃돈을 얹어 택시를 타고 새벽 3시쯤 리마 본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기뻤지만 이는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다. 문화 충격, 인종차별, (현지인들에게) 닫혀있는 마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선교지에 파견되기 앞서 볼리비아 한 가정집에서 스페인어를 배웠다. 3살 된 하숙집 막내아들이 내게 "야! 토마스. 밥 먹어!"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나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는 사제이고 네 부모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아. 그러니 존댓말을 써!"하고 말했다. 그 아이는 "알았어"하고 대답을 하고는 다시 "너(tu)"라고 불렀다. 비단 그 아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를 "너"라고 불렀다.

 언어연수를 마치고 2004년 2월 리마에 있는 한 본당에 부임한 후 현지인들에게 처음 들은 말은 `치노`와 `빠드레 치니또`라는 호칭이었다. `chino(치노)`는 중국인이나 눈이 작은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인종 차별적 단어다. 그래서 내가 "한국 사람은 몽골리언의 한 부류"라고 말해주자 그들은 웃었다. 이곳에서는 다운증후군 환자를 `몽골리꼬(황색인종의, 몽골의)`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본당 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며 답답해하는, 허수아비 같은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이리저리 속이면서 잇속을 챙기는 얄팍한 신자들, 신앙생활의 기본도 모르는 본당 교우들까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를테면 하루에 사제관 문을 두드리는 사람 10명 중 9명은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최대한 가련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도와주면 마약이나 술을 구입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행동이 연극이었음을 알았을 때 배신감은 컸다.

 먼저 다가와 함께 환자방문을 하자고 요청하고 나중에 일당을 요구하는 신자들, 약속한 미사시간에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 어이없는 신자들 모습, 주일미사 시간이 돼도 텅 비어있는 성당,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는 뻔뻔한 사람들….

 청소년들은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행각을 벌였고(페루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소녀 16명이 미혼모가 된다), 어른들은 이를 뻔히 보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살인사건과 도난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전임 신부님은 미사 집전 중 자동차를 도둑맞았다고 했다. 미사 중에 총성도 가끔 들렸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그들이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점점 마음의 문을 닫게 됐다. 그리고 고립된 삶을 살았다.

 어쩌다 식사 초대를 받아 가정을 방문하면 자매의 손톱에 낀 검은 때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땀 냄새가 신경 쓰였다. 집 안에는 쥐가 돌아다녔고, 마룻바닥 곳곳에는 죽은 바퀴벌레 흔적이 있었다. 물이 없는 수세식 화장실, 설사와 벼룩으로 인한 가려움도 참기 힘들었다. 밤새 박박 긁다보면 아침에 손톱에 피가 묻어났다.


 
▲ 아이를 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신자.
 
 
 #군중에게 배반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느 날, 심한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순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동료와 군중에게 배반당하신 예수님과 돌팔매질을 당한 바오로 사도가 떠올랐다. 두봉 주교님과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님들에게 들은 선교체험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욕설을 듣거나 돌팔매질을 당하지 않았는데…`하는 생각이 들자 새로운 시선으로 내 고통을 바라보게 됐다. 실패하더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고 결심했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들을 1년만이라도 사랑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2004년 7월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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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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