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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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볼리비아(중) 곤란해서…

김일옥 수녀(예수성심시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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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 주민들은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에서 생활한다.
집 밖에는 때가 잔뜩 낀 식기들이 놓여있다.
 
 
  새벽 4시 30분. 단잠을 털고 일어나 하루 동안 먹을 일용할 양식을 챙기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서 124㎞ 떨어진, 가장 깊은 정글에 있는 공동체 4곳을 방문하는 날인데 말입니다.
 정글에 비가 오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기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길도 많습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방문을 망설이게 됩니다.

 #돌발사태 빈번한 우기의 정글 방문
 문득 한 달 내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주민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전화가 없다보니 못 간다고 연락을 해줄 방법도 없습니다. 가다가 돌아오더라도 일단 길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길 상태는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건조한 상태라서 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질척거리지 않고 먼지도 일지 않았습니다. 늘 울퉁불퉁했던 길이었는데 빗물에 쓸려 내려온 흙들이 메워줬는지 오히려 운전이 수월했습니다.

 가는 길에 정글에서 만나는 단골손님들 모습도 보였습니다. 여우와 원숭이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녔습니다. 긴 운전 끝에 마침내 정글에 도착했습니다.

 정글 주민들은 더는 길이 없는 곳에 있는 숲을 태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습니다. 또 사냥으로 얻은 고기를 말려 저장해 두고 먹으며 살아갑니다. 정글에 있는 공동체 18곳을 한 달에 두 번씩 돌아가며 방문합니다. 지난번에는 자동차에 넣을 기름을 구할 방법이 없어 부득불 방문을 미뤄야 했습니다.

 볼리비아에는 석유와 가스 같은 천연자원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곳에는 휘발유를 운반하는 차가 일주일에 두 번, 가스차는 한 번 들어옵니다. 연료를 실은 차가 들어올 때 기름을 사지 못하면 다른 곳에 가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겨우 기름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방문을 마치자 점심시간이 됐습니다. 주민들은 식사가 걱정됐는지 저마다 먹을 것을 들고 왔습니다. 한 사람은 삶은 옥수수 알갱이를, 또 다른 사람은 삶은 달걀 몇 개를 들고 왔습니다. 어떤 이는 밥을 한 접시 담아 왔습니다.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점심상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가져온 사람들이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하는 수녀들 주위에 둘러서서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가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달걀 속에는 부화하지 못한 병아리가 들어있었습니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작고 꾀죄죄한 남자아이 한 명이 다가와 엄마 심부름을 왔다며 "우리 집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글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치아가 거의 없습니다. 여성들은 13~14살이 되면 대개 엄마가 됩니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많으면 10명이 넘는 아이를 낳습니다. 영양소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치아관리를 소홀히 해서인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입니다. 치아가 모두 빠진 예순 살 정도 돼 보이는 부인이 4살 된 아이의 엄마인 경우도 있습니다.

 남자아이 손에 이끌려 방문한 집에는 여자아이 한 명이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엄마는 딸의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벽, 통나무로 만든 엉성한 침대, 그릇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녹슨 접시와 컵, 때가 잔뜩 껴서 검은색으로 변한 플라스틱 통에 길어다 놓은 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 정글 주민의 절구질을 도와줬다.
이곳 주민들은 숲을 태워 조성한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치료를 마치고 나니 엄마는 말린 고기 한 덩이를 녹슨 접시에 담아 우리에게 건넸습니다. 가난한 부인이 정성껏 준비한 초라한 음식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더러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곤란했습니다. 참으로 어정쩡한 상황이었습니다.

 동행한 선생님이 우리의 곤혹스러운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먹겠다고 말하라"고 일러줬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한 후 "초대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준비한 음식을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비닐봉지를 찾았습니다. 원래 흰색비닐이었지만 때가 타 검게 변한 설탕봉지를 비우고 거기에 음식을 담아줬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7-18)는 주님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오늘 하루, 한 달, 또 일 년을 살아가면서 내게 배어있는 많은 악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이미 습관처럼 돼버려 의식도 못 한 채 달고 사는 나의 더러움은 얼마나 있을까 성찰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그 부인이 준비한 음식을 기쁘게 먹을 수 있을까요?


후원계좌 대구은행 031-10-006140
             예금주: 포항예수성심시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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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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