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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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① 작은 일에도 큰 깨달음 주시는 은총

이경자 선교사(성 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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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빈민촌 사람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간다.
사진은 필자가 빈민촌 가정을 방문하는 모습.
 
 
  필리핀에서 10여 년 동안 선교사로 살다가 지금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도 필리핀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남아 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웃음으로 눈인사를 건네며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들, 나와 함께 해준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언어공부를 마치고 마닐라 한 빈민지역 선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말이 서툴고 모든 게 낯설었지만 그들은 이방인인 나를 받아주고 함께 했다. 그들과의 나눔, 그리고 그 따뜻한 사람들에게서 본 사랑과 우정은 지금까지 선교사의 삶을 살아올 수 있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다.



 
▲ 빈민촌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나를 웃음과 눈인사로 따뜻하게 맞아줬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얻은 깨달음
 내가 `아떼`(언니)라 불렀던 리사의 남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리사는 암투병 중인 남편과 아들 둘, 딸 하나와 화장실은커녕 부엌도 없는 작은 방에서 살았다. 다섯 식구는 빈민촌에서는 소(小)가족에 속하는 편이다.

 오가며 잠깐씩 인사말을 건네는 사이였던 아저씨(리사 남편)를 처음 방문한 건 병자성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건장했던 아저씨는 병을 앓으면서 체중이 많이 줄어 힘이 없어 보였다. 병자성사를 하러 집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병세가 악화돼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누워 지내는 상태였다.

 갑작스런 아저씨의 건강 악화는 가난하지만 나름 노력하며 살아가던 가족들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무료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수술비와 약값을 마련하지 못해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있는 상황이었다. 아저씨는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병자성사를 하면 바로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터라, 주위에서 병자성사를 권했을 때 아저씨는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병자성사 후 종종 아저씨를 방문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식사도 함께 하면서 친해졌다. 아저씨도 내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프기 전 한국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는 아저씨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한국 음식과 한국인 주인, 그리고 한국 손님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아떼는 이웃집 빨래를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힘들게 번 돈으로 끼니와 약값을 해결하고, 아저씨 병간호를 병행하며 힘겨운 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저씨는 상태가 점점 나빠져 다리가 붓고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복수 때문에 제대로 누워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방문하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내가 서툰 따갈로그어(필리핀 현지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신기했나보다. 잠시나마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회의가 있어 방문하지 못하면 "어제는 왜 오지 않았냐"고 묻곤 했다.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저씨 모습에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때,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다는 말에 강한 의구심까지 들었다.

 하느님에 대한 원망을 스스로에게 쏟아내고 있던 내 눈에 모두들 가난하지만 조금씩 도우며 살아가는 빈민촌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약값과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꾸러 다니는 아떼를 보며 안타까웠는데 그럴 때마다 아떼에게 선뜻 음식을 나눠 주는 이웃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떼 가족은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늘 하느님에게 감사드리며 서로 아끼고 위로하며 지내는 모습은 내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겸손을 잊고 있었던 내게 충격을 줬다. 또 `가난한 이들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나를 깨우쳐 줬다. 갖고 다니던 묵주를 아저씨 손에 쥐어 준 며칠 후 아저씨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선교사의 삶은 은총의 삶
 아저씨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 동안 아저씨와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이 보여준 사랑은 선교사로 첫발을 뗀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방향을 제시해줬다. 눈에 보이는 큰 도움보다 마음으로 함께하며 친구가 돼 살아가는 것은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삶의 기본이며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힘들다고 느끼거나 커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때마다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부족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들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주셨다. 선교사의 삶은 은총의 삶이다. 그리고 그런 은총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후원계좌 기업은행 225-20-435521
                예금주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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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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