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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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② 빈민촌 비오는 날의 풍경

이경자 선교사(성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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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면 빈민촌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한다.
수도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이곳에서 비가 오는 날은 목욕을 할 수 있다.
 

  여느 때처럼 덥고 햇볕이 뜨겁던 날이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낭패다. 한두 번 경험한 일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집을 나오기 전에 맑은 하늘을 보고 `설마 비는 안 오겠지`하는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온 것이다.

 처마가 짧아 비가 오면 창문으로 비가 들이쳐 매번 방이 엉망이 된다. 보통 양산으로 사용하다가 비가 오면 우산으로 쓰는 `양산 겸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만 큰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뛰어서 3분이면 집에 갈 수 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 제발 비가 창문 쪽을 피해 가길 바라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좁은 골목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빙고놀이를 하던 사람들과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비를 피해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목욕하는 날

 비가 빨리 그치길 기다리며 틈틈이 나무 창문을 열고 하늘을 확인하는 이도 있었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신이 났다. 민소매 상의와 반바지를 입고 길거리에서 놀던 아이들과 집안에 있던 아이들까지 밖으로 나와 비를 맞으며 신나게 놀았다. 엄마한테 받은 일회용 비누를 갖고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도시설이 잘 돼 있지 않은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은 수도가 들어오는 집에서 물을 산다. 한 동이에 1페소(26원)이다. 비가 오는 날은 더위도 식히고 공짜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이들은 행복하다.

 다시 내 방 생각이 났다. 방에 비가 들이치지 않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 저래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다. 오늘 아침 새벽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입구에 있어야 할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에 방에 들여 놓고 자는 걸 깜빡 잊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봤지만 아마도 `밤손님`이 다녀 간 것 같다.

 젊은 애들 짓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추측일 뿐이다. 필리핀에 와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지인이 보내 준, 신은 지 얼마 안 된 신발이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가게에서 30페소(약 800원)를 주고 슬리퍼를 사서 신고 다녔는데 이렇게 비까지 내려 마음이 더 어수선했다. 다시 방이 걱정됐다.

 이런 경우에는 비를 맞고 집에 뛰어가 창문을 닫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결국 포기를 택했다. 그리고 내리는 비를 보며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비는 보통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금방 멈춘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그런데 오늘은 큰 길까지 물이 찰 것 같다. 아이들이 비를 맞고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이 어렸을 때 내가 놀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청소년들이 종종 있다.
사진은 필자(오른쪽)와 빈민촌 이웃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

 청소년 교육 예산이 부족해 돈을 모으려 이곳 아이들과 함께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어 프랑스에 판매한 적이 있다. 한국인 친구에게 부탁해 5000페소(13만 원 정도)를 마련해 재료를 사서 시작한 일이었다. 한국 내 출신 본당에도 찾아가 팔았다. 품질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상표도 만들고 봉투에 넣어 포장했다. 상품판매 목적을 적어 도움을 청하는 글도 넣으니 그럴 듯 했다. 아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주는 분들이 고마웠다. 열심히 번 돈으로 아이들과 하루 피정을 다녀오고 나머지는 은행에 넣어뒀다.

 필리핀에서 피정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피정을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님이 생태계 보존 교육을 하는 곳에서 피정을 하고 왔다. 음악과 자동차, 트라이시클(오토바이에 좌석을 단 교통수단)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잠시 벗어나 맑은 공기와 함께 조용한 시간을 가진 아이들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신부님에게서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부님은 돌아가서 각자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라며 숙제도 내주셨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잊힐 수도 있겠지만, 첫 피정에 대한 기억은 아마 아이들 머리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청소년들과 장래 희망이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이곳 아이들은 자신보다는 가족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 대부분 아이들의 꿈이다. 필리핀 인구의 10 정도가 다른 나라에서 일한다. 그들은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낸다. 좋은 옷과 휴대전화기, 게임기를 가진 아이들이 마냥 부러운 빈민촌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주위 환경과 부모들의 무관심 탓에 쉽게 사고를 치기도 한다.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아이들은 13~19살 고등학생ㆍ대학생들이다. 이곳은 중학교가 없고 4년제 고등학교가 있다. 10대 중반 나이에 벌써 아기 엄마가 된 여자아이들도 몇 명 있다. 그 아이들은 대개 부모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세계는 넓고 그 세계에 나가려면 어렵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대부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때로는 안타깝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행복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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