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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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③ ''예, 지금 여기 있습니다''

신현정 선교사(성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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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거리를 걷다보면 수많은 사람의 눈빛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있다.
사진은 거리에 서 있는 필자 모습.
 

  안녕하세요! 저는 필리핀에서 2년째 평신도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신현정 에우제니아입니다.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인 `올롬갑뽀시 안 바레또`라는 바닷가 마을에 있는 성당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레또는 필리핀인들이 휴가 때 자주 찾는 바닷가 마을입니다. 시골이지만 미군기지가 가까이 있어 늘 북적대고 밤이 되면 더 화려해지는 곳입니다. 시장이 있는 중심가 한 쪽에는 교도소가 있어 면회를 하기 위해 줄 서 있는 가족들을 매일 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일주일에 두 번 교도소를 방문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타갈로그어(필리핀 인구의 절반 정도가 쓰는 언어)로 수인들과 성경 나눔도 하고 미사도 함께 봉헌합니다. 그 분들은 늘 저를 기다려주고 반겨주십니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가정을 방문해 주민들 혈압체크와 건강 상담도 해 주고 있지만 많이 부족해 늘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는 선교사로서는 2살 먹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필리핀 문화에 천천히 적응하며 그들 곁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이곳에서 산다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10개월 전 바레또에 처음 와서 가정 방문을 했습니다. 웃통을 벗은 채로 집 밖에 앉아 계시는 아저씨들과 낮술을 마시는 사람들,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고아들, 밤이면 더 화려해지는 거리의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웃통을 벗고 길거리에 앉아 있는 모습은 필리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문화와 역사, 날씨는 얼마나 다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차츰 신경 쓰이는 게 늘어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길거리에서 웃통을 벗고 술을 마시며 인사를 하는 아저씨들의 눈빛, 거리의 고아들과 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엄마의 눈빛, 밤이 되면 조명 빛 아래 앉아 있는 여자들의 눈빛을 피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눈빛을 피하다 보니 그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가난했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더운 날씨에 지쳐있는 모습이 제 눈에는 점점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공허함이 느껴졌고 그들에게 무언가 해주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부담만 늘어갔습니다.

 신경질까지 내는 나를 바라보며 `지금, 내가 여기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 힘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들수록 선교사의 마음과 사랑을 잃어버린 듯 해 절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왜 신경질을 내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본질적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서 부족한 사람은 아닌지, 모난 사람은 아닌지 고민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주시길 하느님께 청하며 그들 눈빛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내 기억 속 아버지의 눈빛은 참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마주치는 가난한 이들의 눈빛과 닮았습니다.

 이곳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웃고, 소통하며 살아가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치유되지 않은 과거 상처가 내게 말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 과거의 상처들이 현재의 나를 건드려 신경질까지 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을 살기보다 지난 날 아픔에 사로 잡힌 채 가난한 이웃들과 인사 한번 시원스럽게 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속상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부족하다고 자책했던 내 자신을 다독거렸습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겠구나. 고생했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신경질을 내고 있는지, 지금 이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도록 나의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을 좀더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을 덮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힌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들의 눈빛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 상처와 역사 그리고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사건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주님 현존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은 참 아프고 힘듭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들을 통해 내 안에 이미 심어져 있는, 단단한 다아이몬드 같은 신성(神聖)을 더 캐내보려 합니다.

 거리를 걸으면 늘 그랬던 것 처럼 웃통 벗은 아저씨와 아이들, 앳돼 보이는 아기엄마, 거리의 여성들의 쌍꺼풀 짙은 눈빛이 저를 향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언제나 먼저 다가오고 웃어줍니다. 저 또한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고 따뜻하게 마주합니다.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제 내면 아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공기처럼 늘 나를 에워싸고 계신 주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면 저는 해맑게 "예. 지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내 신경질까지 감사하게 여기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후원계좌
스탠다드차다드은행 225-20-435521
예금주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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