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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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 "우리 아이는 특별한 아이예요"

김선희 선교사(성 골롬반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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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필자(왼쪽)와 엔젤 어머니.
 
 
  "우리 아이는 특별한 아이예요."
 처음 엔젤(가명)을 만났을 때 그의 엄마가 내게 한 말입니다. 어머니가 말한 `특별한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 속에서 왠지 모를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필리핀 올롱가포시에 있는 바레또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곳 본당 활동뿐 아니라 CBR(Community Based Rehabilitation)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CBR은 장애인과 그들 가족 복지를 위해 1985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핀탄 몰타 신부님이 이곳 이바(Iba)교구에서 시작한 활동입니다. 제가 속한 `CBR 바레또` 회원은 52명입니다. 교육ㆍ의료ㆍ재활치료ㆍ자원연계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필요한 이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CBR 담당 코디네이터 파시타 디초스 자매와 함께 활동합니다. 처음 가정방문 활동을 할 때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마음에 설레기도 하고 나름 긴장도 했습니다.

 "마간당 우마가 뽀!(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들어간 집에는 큰 키에 긴 생머리, 이목구비가 또렷한 예쁜 여자아이가 의자에 앉아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을 잡으며 그 아이와 눈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저와 엔젤은 처음 만났습니다.

 엔젤은 자폐증과 간질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로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엄마가 딸의 곁을 지킵니다. 엔젤을 만날 때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환영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혼잣말을 하듯 내게 무언가 얘기도 했습니다.

 가끔 간질발작으로 기운이 없어 보이거나 밤에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해 보일 때 기운 내라고 등을 토닥여주면 엔젤은 언제나 미소로 답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 간질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엔젤과 그의 어머니는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늘 씩씩하다.
 
 
#으레 쉽게 넘겼던 것들인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디초스 자매와 함께 가정방문을 다니는데, 갑자기 엔젤 엄마가 다가오더니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엔젤에게 뭐든 먹여야 한다"며 "라면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아 디초스 자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엔젤 가족은 그동안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엔젤의 이모가 생활비를 보내줘서 근근이 생활했는데 몇 달 전부터 이모와 연락이 끊겨 상황이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엔젤에게 형제가 있지만 그들과도 연락이 끊겨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집세까지 밀려 돈을 내지 못하면 당장 방을 빼야한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엔젤 가정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가정방문 내내 엔젤과 그의 엄마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엔젤 가족은 끼니를 해결할 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금식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음식이 없어 굶은 기억은 없습니다. 늘 배고픔을 달래 줄 음식이 있었고 감사하게도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 편히 쉬며 잠을 잘 수 있는 방도 항상 있었습니다.

 평소에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현실 속에서 명확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넘치지는 않지만 의식주에 대한 걱정 없이 지내고 있는 현실에 마음 속 깊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져 쉽게 넘겼던 것들이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 내겐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고물상에 팔 재활용품을 찾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 구멍가게 옆에 서서 손님들에게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위험한 도로 위를 오가며 자동차 창문을 닦는 사람들…

 모든 게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사람들을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바라봤는지, 또 마음을 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겸손하게 대했는지, 다시 한 번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리고 감사기도를 바쳤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뜻 깊은 시간을 선물한 특별한 아이
 엔젤네 가족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라면과 통조림을 준비했습니다. 실명으로 도와주면 의존성이 높아질 수 있으니 도움을 줄 때는 익명으로 하는 것이 낫다는 선배 선교사 말을 떠 올리며 함께 활동하는 자매에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언어소통의 한계로 작은 오해가 생겨 결국 제가 직접 드리게 되었습니다. 순간 뜻대로 안 된 것이 속상했지만 이렇게 된 것도 무언가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작은 것에도 고마워하는 그들을 보며 하느님께 또 한번 감사드렸습니다.

 현재 엔젤 가족은 마을에 있는 다목적 무대 옆 작은 공간에 만든 비닐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고향에 가서 일을 하는 동안 엔젤을 잠시 맡겨 놓을 시설을 알아봤지만, 24시간 내내 도움이 필요한 엔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옆 동네에서 빨래하는 일을 하면서 엔젤과 함께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용직이다 보니 일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항상 모녀는 씩씩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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