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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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대만(상)- 주님, 내일 또 올라가렵니다

유철 신부(한국외방선교회 타이완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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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시설이 오래되고 낡아 이곳 저곳 손볼 곳이 많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을 수리하고 있는 필자.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 때는 캄캄한 밤에 큰일을 보러가는 게 제일 싫었다. 조금 떨어진 뒷마당 측간(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들었던 달걀귀신과 `전설의 고향`에서 본 귀신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귀찮아하는 아우를 다독여 늘 함께 다녀왔다. 어쩌다 밤늦게 아버지 심부름을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은 한여름에도 닭살을 돋게 만들었다.

 선교사로 대만에 온 이후 덥고 습한 기후, 언어, 음식 등 많은 것에 적응을 해야 했다. 그런대로 잘 적응을 했지만 오랫동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진이다.

 대만에는 1999년 9월에 대지진으로 많은 가옥이 부서지고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차를 운전할 때, 식사할 때, 자다가도 흔들림을 느낀다.

 어쩌다 제법 큰 놈이 찾아오면 불안한 마음이 다시 도져 혹 여진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한참을 숙소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나마 현대식 건물은 내진설계 공법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지었다고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건립된 성당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제법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지진이 와도 `지난번처럼 흔들리다 말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마음이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지진에 잘 적응한 모양이다.

 한여름 어느 날 작업복을 입고 공구가방을 허리에 두르고 높은 곳에 여러 번 올라간 적이 있다. 오전에는 성모성지 천장 미화 작업을 했고 오후에는 물이 새는 성당 교육관을 수리하기 위해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사람도 늙으면 병이 나듯이 내가 담당하고 있는 성당 네 곳은 모두 지은 지 오래돼 낡았다. 사제관, 교육관도 노후했다. 이쪽을 고치면 저쪽이 고장 나고, 이곳 건물을 고치면 저곳 건물이 고장 난다. 신자 대부분은 어르신이고 봉헌금은 적다. 인부를 부르려 했더니 인건비가 비쌌다. 어쩔 수 없이 건물 수리는 내 몫이 된다.

 수리를 하러 높은 곳에 올라서면 마치 서커스 공연을 하는 곡예사가 된 기분이다. 가수 송대관씨의 노래 `인생은 생방송`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인생은 생방송 드라마. 세상을 줄타기 하네… 넘어질듯 넘어질듯 줄타기 하네. 쓰러질듯 쓰러질듯 줄타기 하네."

 우당 탕 탕 꽝!
 열심히 일을 하던 중 갑자기 큰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한 바람에 그만 긴 사다리가 넘어진 것이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망정이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 일진이 그리 썩 좋지 않네. 혹시 밟고 있는 이 지붕이 푹 꺼지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끊어지거나 미끄러지지는 않겠지? 어제도 아무 일 없었는데, 별 일 있겠어? 아니야 사고가 날 지도 몰라. 야! 너 신부 맞니?`
 큰 소리에 이미 콩알만큼 작아진 내 심장이 지붕을 타며 일을 계속해야 될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신자분이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신부님, 조심하세요!"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넨다. "조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씩씩하게 대답을 했지만 마음 한 귀퉁이에는 `불안`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들어왔다.

 잠시 마음도 안정시키고 줄줄 흐르는 땀도 식힐 겸 지붕 한 편에 엉덩이를 걸치고 휴식을 취하며 상념의 나래를 펼쳤다. `불안(不安)`, 글자 그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관련된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생각하며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생기는 인간의 감정이다.

 고양이를 만난 쥐가 느끼는 공포와는 또 다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동물들은 공포감을 느끼지만 불안을 느끼지는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사고 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감정인 반면 공포감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반응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도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신학교에서 불안에 대한 개념을 배웠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성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까지….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강하다"며 그동안 얼마나 뽐내며 살았던가.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며 힘주어 말했던 모습, 현실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어김없이 무너지는 지금 나의 모습,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눈물이 한데 겹쳐 머리를 스쳐간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1요한 4,18)고 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한없이 멀게 느껴지지만 많은 기도와 묵상으로 믿음의 나무를 키워 완전한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사다리를 마음껏 오르내리는 천사들처럼(요한 1,51).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려와 사다리를 접으며 조용히 속삭여본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님, 내일 또 올라가렵니다."


 
▲ 주일미사 강론을 하고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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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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