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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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케냐(상)- 카쿠마 난민 캠프에서

심유환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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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이 되면 난민촌 이곳 저곳을 다니며 미사를 봉헌한다.
사진은 성체거동을 하고 있는 필자와 난민촌 사람들.
 
 
   카쿠마 난민 캠프는 케냐 북쪽, 남수단과 에티오피아 국경 근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3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전쟁과 분쟁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난민 중 60는 소말리아 출신이고, 25는 수단 출신입니다. 그밖에 에르테리아, 에티오피아, 콩고, 우간다, 르완다 등 총 16개국에서 온 난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1998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저는 좀 더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케냐와 잠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여 동안 자원 봉사를 한 후 선교사제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예수회에 입회했었습니다.

 한국에서 긴 시간 동안 양성 교육을 받은 후 케냐 예수회 대학에서 아프리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오게 됐습니다. 유학 중에 아프리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발견한 답은 바로 에이즈 환자들과 피란생활을 하는 난민 분들이었습니다. 결국 르완다, 남수단의 난민 캠프 실습 후 JRS(예수회 난민 서비스) 일원으로 카쿠마 난민 캠프에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카쿠마 난민 캠프는 UN이 관할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방대한 캠프를 UN이 전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여러 NGO(비정부기구)들과 함께 일합니다. WFP(국제식량기구)는 식량 분배, 적십자는 의료 서비스를 담당합니다. 그리고 JRS는 난민들 고등교육과 장학 사업을 비롯해 장애아동,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 성폭력ㆍ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큰 난민 캠프 안에 사제는 저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하는 살레시오회 인도 신부님 2명뿐이었습니다. 항상 꿈에 그렸던 선교사 생활이었지만 성당도 감실도 없는 투박한 공간에서 종교와 성직자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미국ㆍ유럽 출신 직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섭씨 40도가 넘어가는 무더위와 배고픔쯤은 마음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난민들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했던 제 의도와는 다르게 사무실에서 예산을 살펴보고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동아프리카 본부에 보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밀린 업무를 하다보면 난민들을 면담하고 만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UN 사무실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면 내가 아프리카에 온 것인지, 유럽에 와서 사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회의 중에는 다들 저를 "미스터 심"이라고 부르니 내가 사제인지 회사원인지 헷갈리기만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본 회계 프로그램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들도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JRS 부책임자로 왔지만 보고서나 기안을 잘못 작성해서 어린 책임자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전문가 직원들이 올린 기안을 결재하다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해 주눅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치안 때문에 이중삼중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숙소는 오후 6시 이후 외출이 금지돼 있습니다. 난민캠프에서 다른 지역에 갈 때 항상 무장 군인들과 함께 이동해야 하는 규정은 난민들과 부대끼며 살고자 했던 제 원의(原意)를 다 망가트리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말라리아까지 걸려 몸도 마음도 지쳐 갈 때 쯤 케냐 장상 신부님께 하소연을 담은 긴 전자우편을 보냈습니다.

 "신부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사자 새끼도 아니고 어떻게 혼자 알아서 살아 남으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저를 가엽게 여기시고 에티오피아에 새롭게 문을 연, 분위기 좋고 가족적인 난민 캠프로 저를 파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자우편을 보낸 날 바로 신부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도전이 많다니 축복의 시간이구나. 더 기도하고 겸손하게 그곳에서 많이 배우길 바란다. 선교사의 삶은 네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안에서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부디 잘 살아남길 바란다. 오버."

 그 당시 저는 영화 `미션`에서 본 정말 닮고 싶었던 예수회 선배 회원들 모습이 아닌, 조금만 몸이 아파도 잠을 자고 김치와 라면 먹는 꿈을 꾸는, 많은 것이 부족한 사제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느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 삶 안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난민 캠프 안에서 선교사제가 할 일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약이었습니다.


 
▲ 난민 캠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는 항상 무장군인들과 함께해야 한다.
 
 돌아다닐 때 붙어 다니는 군인들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군종신부 역할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동행하는 군인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막사를 방문해 기도를 하고 나눔을 했습니다.

 지난해 예수 성탄 대축일에 막사를 방문했는데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인기가 절정이었습니다. 군인들이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룰 때가 있는데 결국 이들이 좋은 마음을 가지면 난민들도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만나고 있습니다.

 숙소에서 혼자서 봉헌하기 시작한 아침 미사에는 국제기구나 NGO 직원들이 하나둘씩 참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큰 단체들이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더 가난한 난민들, 장애아동들, 난민심사를 받지 못해 난



가톨릭평화신문  201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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