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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바빠서 순교할 시간도 없어요

필리핀(上) 이상원 신부(한국외방선교회 필리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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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선교사다. 그래서 오늘도 산에 오른다."
이상원 신부가 공소를 찾아가느라 힘겹게 산비탈을 오르고 있다.
 

   사제서품식이 끝나고 해외 첫 선교지 발령을 받기 전, 총장 신부님과 가진 면담이 기억에 생생하다.

 신학교 입학 이후 줄곧 중국 선교를 꿈꿔왔던 터라 매우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광대한 대륙, 그래서 더 많은 그리스도 사랑이 필요한 그곳에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희망이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었다. 하지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베다 신부님, 필리핀으로 가세요."
 `필리핀?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 아닌가? 선교사제가 굳이….`

 비그리스도교 국가 어느 곳에서든 순교할 각오가 돼있었는데, 하필 가톨릭 국가로 가라고 하셨다.

 3년이 흐른 지금의 필리핀 생활에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속 공소를 매일 오르락내리락 누비면서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너무 공소가 많다보니, 바빠서 순교할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1년도 못 버틸 것 같던 선교사  

 교통편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사제가 턱없이 부족해 신앙의 사각지대가 점점 늘어나는 게 필리핀교회 현실이다.

 한 공소마다 이동거리가 걸어서 평균 5~6시간 걸린다. 이렇게 매일 걸어 한달 동안 모든 공소를 순회한다. 그런데 예정에 없는 병자성사나 혼배성사 때문에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산에 갔다 나올 때면 나 역시 병자성사(?)를 받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아직 적응이 덜 된 탓인지 지금도 이 기도가 간절해진다. `주님! 지친 내 다리보다, 지친 내 육신보다 더한 그 마음을 주십시오.`

 병에 걸렸는데도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침상에서 죽어가는 그들보다, 가진 것은 없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보다 먼저 지쳐 쓰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버텨내는 삶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면,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희망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이다.

 한 본당 신자가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신부님은 이 산에서 1년도 못 버티실 거예요."

 오죽 힘든 환경이면 그런 말을 하는가 싶어 처음에는 오히려 측은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새내기 선교사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토속어가 통하지 않고, 토속음식에 속이 늘 울렁거리고, 산길을 타느라 다리는 후들거리는 외국인 선교사가 그들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신자들은 내가 주저앉지 않고 버티면서 그마나 잘 살아가는 것을 놀라워하며 기뻐한다. 선교사로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 감사 표현은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들을 향한 내 사랑이 조금씩 커가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다.

 
▲ 본당 청소년들과 깊은 산속에 있는 공소를 찾아가는 길에서.
가운데 선 사람이 이상원 신부.
 
 
# 행복은 행복을 낳고

 몇 달 전, 3년 만에 첫 정기휴가를 받아 한국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병원 원장 선생님이 "더 이상 산을 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유인즉, 연골이 너무 닳아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산을 타지 못하면 더 이상 선교사제일 수 없다"고 말했다.

 병원 측의 배려로 급히 연골재생수술을 받고 다시 필리핀에 돌아오니까 더 행복하다. 신자들을 다시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산을 다시 탈 수 있어 행복하고, 이 행복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행복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 있어 행복하다.

 이 행복은 예수님의 행복과 다른 게 없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산이 우리 발걸음을 지치게 하고, 폭우가 영혼의 시야를 가려도 우리가 이르러야 할 곳이 천상의 그곳이라면, 이 세상에 이르지 못할 데가 없음을 선교사들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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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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