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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제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상원 신부(한국외방선교회 필리핀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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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고산지대 원주민들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의 삶은 화려한 실패 투성이다.
공소 신자들과 함께.(앞줄 가운데가 이상원 신부)
 
 고교 시절에 본 영화 `미션`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예수회 소속 가브리엘 신부가 정글에 사는 공격적인 과라니족의 마음을 아름다운 오보에 선율로 누그러뜨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은 꽤나 유명하다.

 그 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1500m 필리핀 고산지대에 있는 본당을 처음 맡았을 때 좀 긴장했다. 원주민들은 활이나 창, 도끼 같은 건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도끼눈(?)을 뜨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다정하게 말을 걸었지만 환대는커녕 곁으로 다가오려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 삶은 돼지고기의 공포

 하지만 두 달이 지나서야 그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서 그런다는 것을 알았다. 신부와 얘기하고 싶어도 부끄러워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내가 너무 못생겨서 피하나 싶어 절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선율의 가브리엘 오보에 연주를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순간 서로의 다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이곳 원주민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돼지를 잡는다.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함께 모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데, 점심식사로 돼지고기 덩어리를 한 접시씩 받아 가져간다.

 끓는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데친 듯한 돼지고기는 나로서는 참 소화해내기 힘든 음식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내가 특별한 손님인 양 돼지고기를 항상 부위별로 후하게 챙겨준다. 작은 고기 한 점도 벅찬데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다. 선교사 정신을 발휘해 한 번 시도한 적이 있지만, 그 다음날 하루종일 화장실에서 살다시피했다. 통과의례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또 잔치에 초대받아 그 도전을 대면하게 됐다. 다시금 꿈틀거리는 선교정신이 무엇인지 입증하려는듯 큰 고기 덩어리를 베어 물던 그날, 배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참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한 번 선교정신을 발휘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 잔치 때마다 하얀 쌀밥이 내 접시 위에 놓여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 신자들은 아직도 모를 것이다. 고기는 먹는 척만 하고, 쌀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웃고 있는 내 심정을…. 속으로, 겉으로 살이 쪽쪽 빠지는데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하니 가끔은 서럽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들을 닮아가는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과 사랑의 포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다.
 

 
▲ 성주간 행사를 마친 다모꼬공소 신자들.
 

 # 커피도 못마시는 선교사

 이곳 주민들의 손님 접대는 대개 직접 재배한 커피로 시작해서 커피로 끝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도 커피는 빠지질 않는데 문제는 내가 커피를 못 마신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커피보다 더 무서운 게 없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주민들 눈에서 도끼날을 본 적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커피를 못 마시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정성스런 대접을 뿌리치는 이방인 선교사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제대로 받은 것 같았다. 사실 커피 때문에 가정방문이 껄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교사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후로 가정방문 때마다 넘치도록 따라주는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집안 별로 다른 형형색색의 독한 커피 맛이 견디기 힘들 때는 산책하는 척하면서 풀밭에 부어버리곤 하는데, 그럴 때면 신자들은 참 귀신같다. "신부님, 한 잔 더 드세요." 그렇게 하루에 서너 집을 방문하고나면 그날 밤은 하염없이 길어진다.

 원주민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나의 삶은 화려한 실패 투성이다. 하지만 이러다 쓰러지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여태껏 살아있는 건 순교정신 덕분일 게다.

 선교사는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 누군가 알아주겠지 하는 기대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게 바로 선교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내일은 또 어떤 도전이 다가와 복음 안에서 서로 변화되고 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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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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