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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구세군? 산악인? 아니 선교사!

이상원 신부(한국외방선교회 필리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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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칼을 들고 용맹한(?) 포즈를 잡은 공소 어린이.
 

  본당을 맡아 선교사로 살아가는 필리핀 북쪽 뱅겟(Benguet)지역 바쿤시 암푸숭안은 가톨릭이 전해진 지 60년이 채 안 된다. 600년에 달하는 필리핀 복음화 역사를 생각하면 늦어도 너무 늦다.

 공소미사를 위해 5~6시간씩 땀을 뻘뻘 흘리며 산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첩첩산중에 숨어 사는 걸까?`

 산속 원주민들은 나의 이런 생각에 모두 박장대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 마닐라에서처럼 월세나 전세를 낼 필요도 없고, 수도료를 비롯한 공과금과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어쩌면 이곳이 파라다이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주민들은 가진 것은 없지만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정도의 삶만으로도 행복해한다.

 # 식민통치 시절에도 외면당한 오지

 사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소를 찾아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다보면 내가 군인인지, 구세군인지, 산악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신자들에게 짓궂은 농담을 한다.

 "왜 이런 산속에 살아서 신부를 힘들게 하세요."

 산 넘고 물 건너서라도 원주민들을 만나겠다는 열정이 산 중턱쯤에 이르면 타는 갈증 때문에 모두 증발해버리는 듯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무릎 연골이 닳도록 산을 타지 않으면 원주민들은 신부를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본당으로 직접 찾아오면 좋겠지만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아이 딸린 엄마들이 산을 타기에는 너무 험하고 거리도 멀다. 그래서 이내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오죽 하늘나라와 가까워지고 싶으면 이렇게 높은 산악지대에서 사는 걸까?`

 필리핀은 여러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숱한 고초를 겪어왔다. 그러나 야심찬 강대국 군대도 이곳 뱅겟지역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산세가 워낙 험해 군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뱅겟은 식민통치 시절에조차도 버림받은 지역이다. 이 점이 지금 원주민들에게는 일종의 자부심으로 통하고, `산에 사는 본토인(이고롯,igorot)`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준다.

 이들에게 산은 삶의 터전이자 또 다른 자부심이다. 가난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 줄 아는 그들의 천성이 풍부한 유산으로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숨쉬고 있다.

 이들과 살다보니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이고롯`이 돼가는 것 같다. 그렇게도 싫었던 산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원주민들도 좋아한다. 한국에서 산을 잘 타는 신부가 왔다고 말이다.

 이들 언어로 얘기하고, 이들 음식을 함께 나누며, 이들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흘리는 눈물 앞에서, 이들의 진솔한 웃음 앞에서 그 모든 피로가 싹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한 이방인 선교사가 이고롯이 돼가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른다. 이들을 도와주려고 왔지만, 오히려 내가 그 수혜자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저질 체력`으로 거대한 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지친 다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용기를 나는 매일 삶 안에서 이들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 본당 청년들과 공소 방문하러 가는 길.
산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소를 찾아다니다보면 산악인인지, 선교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 원주민들의 반쪽이 되는 것

 선교사로서 한 가지 힘든 점이 있다면, 이들의 배고픔을 나의 배고픔으로 채워주지 못하고, 이들의 아픔을 나의 상처로 치유해주지 못하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이들의 필요가 나의 전부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얼마나 뼛속 깊이 사랑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선교. 그것은 이들의 반쪽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랑의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글을 통해 평화신문 독자들에게 인사를 드린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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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 512601-01-102007 예금주 : (재)천주교 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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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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