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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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첫 선교지에서의 시련

대만 정운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대만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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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물차에 올라 타신 성모님`
대만 신자들은 5월 성모성월이 돌아오면 화물차나 수레에 성모님상을 모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기도를 바친다.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교구청에 짐을 풀고 중국어 공부에 몰입했다. 2년이 다 된 어느 날, 주교님께서 부르시더니 자그마한 마을들이 있는 산골에 가서 원주민 사목을 하라고 하셨다.

 발령을 받고 차로 2시간 정도 달려가니 정말 내가 살았던 시골 같았다. 산속에 마을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고, 그 속에 공소가 있었다.

 나는 이 산속 마을로 올 때 이곳 주임신부인 줄 알았다. 주교님이 설명을 자세히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신부가 나 혼자인 줄 알고 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본당 신부가 있었다. 미국 출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였다. 본의 아니게 보좌 신부로 살아가게 됐는데, 본당 신부는 소속 선교회가 달라서 그런지 좀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텅 빈 공소에서 신자 기다리는 고역

 그건 그렇고 그동안 열심히 배운 중국어가 이 산골에서 통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었기에 나는 그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벙어리 생활부터 시작한 꼴이다. 그나마 젊은이들과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어를 할 줄 알아 다행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어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일주일 중 닷새를 강론준비에 매달려야 했다. 복음을 묵상하고 강론을 써서 중국어 선생님한테 가져가 교정을 받고서야 신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은 마을별로 가정기도회가 있는 날이라 그들을 방문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7개 공소를 돌며 미사를 드렸다.

 그런데 나는 원주민 말도 못하고 중국말도 짧아 거의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강론을 준비했는데, 신자들이 강론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아 야속할 때가 많았다.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해야 강론을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외국인이 타국에 와서 자신들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준비했건만, 그걸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그들을 볼 때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하고 스스로 묻곤 했다.

 공소 한 군데를 제외하고 나머지 6개 공소 사정이 비슷했다. 늘 내가 먼저 성당에 도착해 신자들을 기다리는 식이었다. 텅 빈 공소에서 제 시간에 오지 않는 신자들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공소에 도착하면 바닥에 떨어진 하루살이와 먼지를 치우고 미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미사에 나오라고 성가를 크게 틀어 놓는다. 성가는 공소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마을로 퍼져 나간다. 그래도 20~30분 기다리는 건 보통이다. 1시간을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온 적도 있다.

 기다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내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신자들을 기다릴 게 아니라 미사가 좀 늦어지더라도 먼저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집집마다 노크을 하기 시작했다.  

 직접 찾아와 미사에 나오라고 재촉하는 나를 바라보는 그들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식사를 하다가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동네 사람들과 잡담을 하다, 또 어떤 사람은 TV를 보다 노크소리를 듣고 마지못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늦게라도 참례한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올 때면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내가 먼저 찾아가야 나올 텐데….` 스스로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 여성 신자들과 레지오 마리애 호합을 마치고(가운데 필자).
 
 
 #겨우 5명이 엄청나게 많다고?

 가정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모이기로 약속한 집에 가봤더니 주인도 없고 마을 신자들도 보이지 않아 집집마다 찾아다니는데 어느 집에서 아주머니 셋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합석하라고 손짓했다. 기도회에 나오지 않고 여기서 술을 마시면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어쨌든 한 잔 하라고 나를 앉혔다.

 어차피 오늘 기도회는 물 건너 간 것 같아 함께 하기로 하고 지난 주일미사에 왜 보이질 않았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묻는다.

 "몇 명이나 나왔어요?"

 "다섯 명 정도 나왔어요."

 "그 정도면 엄청나게 많이 나온 거예요."

 내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럼 한국 성당에는 주일미사에 몇 명이 나오냐?"고 물었다.

 옳지! 제대로 물어봤다 싶어 "시골 본당은 몇 백 명이 기본이고, 시내 본당은 몇 천 명 나오는 곳도 많다"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들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면(面) 인구보다 많네" 하는 게 아닌가.

 원주민들과 부대끼며 산 지 1년이 다 됐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주교님이 바닷가 근처에 있는 작은 본당을 맡기셨다. 그런데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벌써 정이 들어서일까.

 공소마다 돌아가면서 송별식을 해줬다. 집집마다 음식 한 가지씩 준비해 갖고 와서 함께 나눠 먹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송별식에 참석한 것 같았다. `만날 신부가 찾아다니게 하더니만 떠난다니까 서운한 모양이지.`

 이 이방인 선교사의 속은 썩였어도 산골 사람들 정이 고맙기만 하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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