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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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하) 자이니찌(在日), 한국계 일본인과 조선계 일본인

이상원 신부(예수회, 일본관구 야마구치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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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지진해일이 휩쓴 일본 도호꾸 지방을 찾아가봤다.
폐허가 된 주택가와 뼈대만 겨우 남은 일부 건축물뿐이었다.
 
#일본은 행복한 나라?

 어느 수녀회 국제회의가 일본에서 열려 각 나라 장상 수녀들이 모였다. 수녀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은 행복한 나라"라고 말했다. 일본 방문이 처음이라 겉치레만 눈에 먼저 들어왔을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위태로운 나라다. 해마다 일본에선 고독사로 3만 명이, 자살로 3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지난 10년간 이라크 전쟁 희생자 수가 10만 명을 넘었다지만, 통계로 보면 일본이 더 위험하다. 자살률을 보면 남성이 7할이고 여성이 3할이다. 특히 50, 60대 남성 자살률이 높다. 한데 자살미수 비율은 여성이 7할, 남성이 3할로 최근 역전됐다.

 일본인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은 경제발전 덕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깊이 파고든 나라일수록 행복도 순위는 낮은 법이다. 자기 책임과 경쟁 논리에 철저한 자본주의 가치관은 사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들 마음 안에까지 침투해들어간다. 결국은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나 노인들은 배제해 버리고 만다. 일본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거대한 세력과 날마다 싸우며 걸어가야 하는 그런 힘겨운 사회가 돼버렸다.

 #자이니치…, 한국계 일본인과 조선계 일본인

 새로 부임한 성당에서 한 신자가 살짝 귀띔해준다. "신부님, 저 사람은 자이니치(在日)입니다. 원래는 한국인인데요, 귀화했어요." 이는 성당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는 대화이기도 하다. `자이니치`란 재일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을 뜻하지만, 귀화해 일본 국민이 돼도 자이니치라는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닌다.

 일본은 미국이나 남미에 이주해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한 일본인과 그 자손들을 `일본계 미국인` 혹은 `일본계 브라질인`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는 왜 똑같이 일본에 이주해 국적을 취득한 이들을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이니치라 부르는 걸까? 귀화해서 일본 국민이 됐다 해도 절대로 일본인이라고는 부르려 하지 않는 사회적 풍조는 선을 그어놓고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는 데 있다. `너희들은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하는 차별의식이 뿌리 깊게 깔려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난 자이니치라는 단어밖에 없는 일본 사회를 향해 교회가 `한국계 일본인` 혹은 `조선계 일본인`이라는 단어를 쓰기를 제안한 적이 있다. 이런 내용으로 일본 가톨릭신문과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회보에 기고한 적이 있지만, 지금껏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 야마구치 우베지구에서 지구회의를 갖고 있는 예수회 일본관구 야마구치지구장 이상원(오른쪽)신부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지 성찰하라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가장 행복했던 점은 아메미야라는 사제를 만난 것이다. 대학원 과정에서 수강한 아메미야 신부의 구약성경 강독은 늘 긴장이 감돌았다. 원문은 히브리어, 교과서는 영어, 설명은 일본어, 이해는 한국어로 했다. 강독이 끝나면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시편 32편의 `고백하다`와 시편 33편의 `감사하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은 같은 단어다. 고백이라는 감사, 감사라는 고백인 셈이다. 당신에게 고백하고 싶다는 것은 내가 감사하고 있다는 마음이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나는 고백한다는 뜻이 된다.

 요즘 판공성사로 고민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선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진정 감사하고 있다면 그것에 감사하지 못했던 데 대해 미안한 감사의 마음이 움틀 것이다. 그것을 고백한다. 감사의 고백성사가 될 것이다.

 어떤 기도모임에서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감사가 뭐예요?" 모두 웃었다. 웃기려고 했나 싶어 쳐다봤더니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감사가 무엇인지,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난 작은 소리로 읊으며 천천히 걷는다. 이른바 `미음완보(微吟緩步)`다. 걷지 않으면 숨이 짧아지고, 숨이 짧아지면 생각도 짧아진다.

 몸이 지쳐 쉬고 싶을 때는 큰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서점엔 날마다 신간이 쏟아져 나오지만 죄다 읽을 수도,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책 제목과 겉표지만이라도 읽는다. 마음에 드는 내용은 메모해 묵상 주제로 삼는다.

 며칠 전 서점에 갔을 때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식사 후 수도원 성당에 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놈은 왜 웃지 않고 무표정일까? 그랬나보다, 거울이니깐 그랬나보다. 내가 먼저 웃지 않으면 저놈은 웃질 못한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웃어봤다. 귀엽다.

 인구 12억 명에 가톨릭 신자 40만 명(0.3)인 일본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슬픈 날은 슬퍼, 슬픈 날은 슬퍼. 기쁜 날은 기뻐, 기쁜 날은 기뻐.` 선교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생활이 아닌가 싶다.

 "아리가또우(ありがとう, 고맙습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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