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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4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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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우 신부



어린 시절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자주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르시는 목적은 대부분 심부름이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신 나게 노래 부르며 하는 심부름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구시렁거리며 하는 심부름도 제법 있었습니다. 당연히 대가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도와드렸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꾀를 부려 못 들은 척하거나 숨어 있다가 혼이 나고 기분도 엉망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고했다며 맛있는 간식이나 심지어 용돈이라도 주실라치면 그 기분 최고였지요.

사실 우리는 부르심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상이 부르심과 응답의 연속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부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대를 부를 때는 무엇인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기에 가끔 그냥 불렀다는 이들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어떨까요?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부르심과 응답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성소라면 하느님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는 응답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싱거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그것을 사제 성소, 수도 성소, 혼인 성소 등으로 구분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있고,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감각(sensus fidei)을 키워야 합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든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감각을 키워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또한, 그분은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분께 시선을 고정한 채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며 함께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뛰어난 감각을 얻게 될 것이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고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길잡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여러분 모두 성소 안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이성우신부 (요셉,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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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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