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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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처럼

[월간 꿈 CUM] 말씀과 함께 희로애락(喜怒哀樂)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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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수도원에서 막내 수녀님들이 모여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기도와 침묵으로 수련을 해도 모자란 시간에 웬 웃음? 이를 본 원장 수녀님은 수상한 나머지 슬그머니 다가가 지켜본다. 아니나 다를까, 웃음의 까닭은 얼마 전 들여온 앵무새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엄한가?’ 이 외딴 수도원에서 고작 앵무새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수련자들을 향해 괜스레 미안해진 원장 수녀님은 이제 어린 수녀님들 곁으로 친근하게 다가간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는 막내 수녀님들. 원장 수녀님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감지하며 주변을 자세히 살핀다. 그런데 앵무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이던 말을 계속 반복한다. “원장 수녀 죽어라! 원장 수녀 죽어라!” 

미간 사이에 내 천(川)자가 새겨진다. “아니, 저것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원장 수녀님은 결국 면담을 청하며 주교님을 찾아뵌다. 주교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주교님은 이 원장 수녀님을 안쓰럽게 쳐다보시며 말씀하신다.

“저런, 수녀님 속 많이 상했겠구먼. 내가 교구청에서 키우는 거룩한 앵무새를 선물해줄 테니 그 못된 앵무새 곁에 두고 키워보게.”

교구청에 면담하러 갔다가 거룩한 앵무새를 선물 받아온 원장 수녀님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제 이 거룩한 앵무새 덕에 못된 앵무새도 착해지겠지?’ 그리고는 아직도 “원장 수녀 죽어라! 원장 수녀 죽어라!”를 지껄이는 앵무새 곁에 거룩한 앵무새를 두고 함께 키우기 시작한다. 며칠 후, 정원을 거닐던 원장 수녀님은 또다시 막내 수녀님들을 목격한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간 원장 수녀님은 뭔가 불길함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막내 수녀님들뿐만 아니라 수도회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다가가니, 아니 지난번보다 더 크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능적으로 ‘이건 아닌데!’를 느낀 수녀님이 앵무새 곁으로 다가가자, 대부분의 수녀님들은 순식간에 그 자리를 박차고 사라진다. 이때 들려오는 못된 앵무새의 변함 없는 지껄임.

“원장 수녀 죽어라! 원장 수녀 죽어라!” 이어지는 거룩한 앵무새의 소리.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본 글을 기억에 의존해 각색해 보았다. 그저 한 번 웃고 말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요즘 들어 내가 기도할 때 앵무새처럼 하는 것 같다.

첫영성체 시즌을 맞아, 의지가 불타오르는 초등학생들과 교리 공부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사도신경을 시켜보면 대부분 이렇게 왼다.

“전능하신 천주, 천주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아니, 천주를 누가 또 창조하셨단 말인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상당수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어 고백하기보다는, ‘천주의 창조주’를 고백하신다. 답답해하며 다시 설명하는 찰나,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너라고 다르겠니?’ 뭐지? 성령의 목소리인가?? 그렇다. 나는 입으로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고 해놓고, 머릿속에선 ‘아 더워.’ ‘아 제대 위는 왜 이리 더운 거냐.’ ‘미사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등등의 생각들이 교차하며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어떠실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저거 웃긴 놈이네, 지가 주례하는 미사를 빨리 끝내려면 지가 강론을 짧게 하든가?”

미사 드리는 교우분들도 성격이 급하시거나 미사를 빨리 마치고 집에 가고픈 분들의 기도 소리는 미묘하게 다르다. 가령, 자비송을 낭송할 때가 그렇다. 차분히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은 천천히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신다. 하지만 빠르게 바치면 ‘자비’는 종종 ‘차비’로 들리곤 한다. “주님, 차비를 베푸소서.”(궁금하시면 각자의 성당에서는 어떻게 들리는지 확인해 보셔도 좋을 듯하다^^) 기왕이면 주님께 학비나 성지 순례비를 달라고 청할 것이지, 차비는 너무 소박하지 않은가?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살 수도 있겠지만, 영혼을 끌어모아 기도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어를 말하는 소리에 집중한다고 해서 전부 잘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라는 두 음절에 엄마의 모든 걸 담아낼 수 없듯이, ‘주님’ 이라는 두 음절에 신을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 단어 하나하나에 내가 체험한 주님을 연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앵무새가 아닌 구약의 유딧이나 에스텔처럼, 각자의 삶을 담아 성령과 함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청해본다.! 
 

글 _ 김용우 신부 (베드로, 대전교구 당진본당 보좌)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동시에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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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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