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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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길 in 필부

[월간 꿈 CUM] 철학의 길_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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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불조심 표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그 불이 큰불이 되어 온 산을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세상을 온통 태워버릴 화마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와 큰 불씨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먼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이처럼 가장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이 큰 성과를 이루게 됩니다. 공자의 하루도 오줌 누고 똥 싸는 비루한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원한 군자의 길도 필부의 길 안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중용」은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之道 ?如行遠必自邇 ?如登高必自卑

군자의 길은 비유컨대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하는 것과 같고, 비유컨대 높이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과 같다.

위 구절은 일상의 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까울 ‘邇’(이)자는 고운 비단(爾)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데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낮고 비천한 ‘卑’(비)는 하인이 부채를 들고 주인을 시중들고 있는 글자입니다. 땀을 식힐 바람도 비천한 하인이 손에 든 부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처럼 일상의 도란 가까울수록 더 값지고 낮을수록 더 근본이 됩니다. 일상의 도는 너무 평범해 우리는 그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있을 수도 없을 수도한 것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하기에 ‘必’(반드시)이 문장을 수식해 주고 있습니다. ‘必’은 무기의 손잡이를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아무리 천하를 지켜주는 무기라 할지라도 손잡이가 없으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천하의 대장군 손에 칼날을 쥐여줘도 제 손만 베일뿐입니다. 소소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부분, 일상은 우리에게 그런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옛날 어느 나라의 한 왕이 신하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고자 했습니다. 왕은 초대받은 모든 신하들에게 포도주를 한 병씩 연회에 가져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가져온 포도주는 큰 항아리에 모아 연회 때 제공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꾀를 내었습니다. “포도주 한 병 정도 없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어? 대신 나는 물을 담아가야겠다. 한 병쯤은 물을 섞어도 티가 나지 않겠지.” 한 병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그는 포도주 대신 물병을 가져가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드디어 연회가 열리고 왕은 참석한 신하들을 환영하며 큰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를 신하들에게 따라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의 잔에 담긴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모두 물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신하들이 한 병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물을 담아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포도주를 마신 신하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물 한 병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의 결과였습니다. 일상의 작은 일이지만 그것을 소홀히 하면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잃고 맙니다. 언제나 술이 아닌 물만 마시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용」의 다른 구절에서도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道不遠人)라고 합니다. 따라서 도는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저 멀리 원대하고, 저 높이 고상한 것에만 시선을 두고 있어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의 하느님도 ‘임마누엘’이시듯 일상을 벗어나 따로 계시지 않습니다. 야곱이 형 에사오를 피해 도망자 신세였을 때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꿈을 꿉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층계)를 천사가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꿈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신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야곱이 말하길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창세 28,17) “이곳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 이처럼 하느님께 가는 하늘의 문은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이 내가 있는 이곳에 있습니다. 사다리가 땅으로부터 하늘로 맞닿아 있듯 나의 삶 가까이로부터 길(道)은 하늘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 역시 「논어」에서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칠갑산 기슭, 똥자루 들고 거름 주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합니다. “좋은 인생이란 말이지~ 마지막에 웃는 놈이 아니라 자주 웃는 놈이구먼~.” 인간의 길을 저 먼 곳, 저 높은 곳에서 찾는 사람, 가정의 행복을 큰 부와 성공에서 찾는 사람, 나라의 행복을 대단한 성장률에서 찾는 사람, 그들은 마지막에 웃으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이들과 일상으로부터 찾는 사람은 지금 그리고 자주 웃게 됩니다. 자식 생각에 땀 흘려 밭 갈다 방귀 뀌며 깔깔대는 시골 할매들처럼, 방귀 소리에도 우리 사회는 왜 자주 웃지 못할까요. 항문을 틀어막아서라도 방귀 소리를 막아 웃음을 저축하니 말입니다. 웃음엔 저축 이자가 없습니다. 그냥 필부로 삽시다. 오늘의 필부 속에 군자의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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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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