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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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소통의 시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은 ‘경청’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59. 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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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소통의 시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은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일이 아닐까? OSV

어느 날 한 여성이 가정 불화로 인해 나를 찾아왔다.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는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환한 미소를 띠며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마치 나의 순수한 경청의 행위가 희석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시대,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돈을 주고 나의 말을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다닐 거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세상이 점점 경청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과잉소통’의 시대, 듣는 일이 힘겨운 노동이 된 것은 아닐까? 언젠가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이어가다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하나씩 이야기해요”라고 하자 “그건 왠지 밋밋해요. 나는 동시에 다 들을 수 있는데” 하며 다른 사람이 받아치면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사람들은 ‘맞다 맞아’ 하는 듯한 큰 웃음으로 공감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의 대화방식은 언제부턴가 인터넷 검색하듯 파편화되어 비연속적·비선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책을 읽듯 주제별로 하나씩 이야기하면 마치 토론하는 느낌이 들어 지루하다고 한다. 부부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한 사람은 이야기하고, 배우자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은 익숙하다. 친구끼리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지만, 시선은 손안의 스마트폰에 가있는 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심지어 어떤 이는 “선보는 자리도 아닌데 너무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면 서먹하다”라고 한다. 오프라인에서의 ‘접촉’도 온라인의 ‘접속’과 같은 소통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실제로 존재하는 ‘현존성’에서 대상과의 대화방식이 무제한으로 열린 가상공간에서 대화하는 모습처럼 다가온다. 검색창에서 다양한 메뉴 정보를 선별하듯 흥미도에 따라 쏠리고 몰리는 산만한 소통 활동에 익숙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면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가 아닌 뭉뚱그린 ‘형태’만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대화할 때의 나의 감정, 분위기, 그리고 단어 몇 개로 기억을 더듬어간다. 그럴 때 우린 쉽게 나이 탓을 하지만 사실 주의력의 문제일 경우가 더 많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사용할 때 우리는 정신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의 유혹은 우리의 뇌를 산만하게 하고 주의력과 집중력을 저하시킨다. 주의력의 약화는 ‘경청’을 어렵게 하고, 잘 듣지 않으니 또 기억할 수도 없다. 경청은 소통의 기본 핵심이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으로 이끌어내는 소통의 주요 덕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청’을 강조한다. 언론인들에게 ‘마음의 귀’로 들으라고 당부하고, 우리에게도 공동체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청하는 법을 배우고 침묵으로 들으라고 당부한다. 수도자들에게 듣기 위해서 내면의 침묵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주의를 기울이고 다양한 소리를 음미하고 식별하고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활동하는 사이버 대지에는 ‘침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끊임없이 말하고, 그 말은 또 가볍고 요란하다. 디지털은 경청하는 일을 점점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

‘침묵’은 산만함을 가라앉게 하고 고요함이 깃들게 한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주고 챙겨주면서 타인의 필요를 알아챈다. 침묵은 주의력으로, 경청으로, 그리고 기도로 옮겨간다. 딱딱하고 상처받아 굳어진 언어들을 품어주고 치유해주면서 아래로 내려가 ‘고독’의 공간에서 홀로 서게 한다.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린다. 과잉소통의 시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은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일이 아닐까?


영성이 묻는 안부

‘영혼 없는 리액션’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대충 듣고 형식적으로 보여주기식의 반응이지요. 언젠가 한 지인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고달픈 처지에 대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때 그 지인은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 “응”, “그랬구나” 하는 친구의 말이 그저 기계음처럼 공허하게 들렸던 거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굳이 주의력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서정록은 「잃어버린 지혜, 듣기」에서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라고 하는데요. 그런데요. 거꾸로 세상은 눈을 통해 원하지 않는 순간에도 마구 침범해 들어오고, 세상은 또 귀를 통해 요란하고 공허하게 흘러나갑니다. 그 어느 때보다 ‘듣기’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처럼 ‘듣기 위해 무엇보다 깊은 내면의 침묵 시간’이 필요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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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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