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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월간 꿈 CUM] 인생의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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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계적인 철학자 막스 쉘러(Max Scheler, 1874~1928)는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다음 날, 엄청나게 많은 학생과 일반인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왜냐하면 막스 쉘러의 강의는 언제나 거침이 없는 명강의였고, 늘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최고의 강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그의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듣기 위해 전 세계에서 밀물처럼 몰려왔습니다. 더군다나 강의 주제가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사람들은 그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막스 쉘러는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강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막스 쉘러의 모습은 끝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온 교직원이 강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이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사실 그는 강의 당일 아침 식탁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져 운명하였습니다. 막스 쉘러는 그렇게 죽음에 대한 말로 하는 강의가 아닌, 삶 자체를 통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장 훌륭한 죽음의 강의를 했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입니다. 즉, ‘오늘은 나에게 죽음이 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죽음이 갈 것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격언은 사실 이렇게 풀이해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구원이 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구원이 찾아 갈 것이다.”

어쨌든 죽음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죽음은 그 누구도 연습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죽음은 그 누구도 직접적인 경험을 해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가장 간단한 말로 정의해 보면 ‘삶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육체적이고도 세속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인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삶은 끝이 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고 마무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生)과 사(死)의 문제일 것입니다. 생(生)은 지금 당하는 일이고, 죽음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장차 당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죽음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모두 ‘당면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막연한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 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인간은 세 가지 인생을, 세 번의 삶을 산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품에서 열 달 동안 제1의 인생을 살고, 출생 후 자기의식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삽니다. 이렇게 볼 때 제1의 인생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1의 인생에서 출생이라는 문을 통과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하여 제3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제2의 인생 또한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2의 인생은 참으로 중요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죽음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생과 내세에 관한 관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황천에 간다고 하였고, 옛날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묻기 전에 입에다가 돈을 한 입 넣어주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강을 건너 다른 세계에 갈 때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철학자 플라톤과 치체로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사불멸하며 반드시 살아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인간 역사 안에서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흔쾌한 대답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나아가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보았거나, 죽음을 물리쳐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보았고, 또한 죽음을 극복하신 분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글 _ 이창영 신부 (바오로, 대구대교구 대외협력본부장)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 대구가톨릭요양원 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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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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