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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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사랑

[월간 꿈 CUM] 목계반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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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단골 중에 농사를 아주 크게 하시는 김씨 아저씨가 계셨다. 

대농이신 그분이 주로 하시는 일은 일꾼들 관리하고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게 전부인데, 밭에서 같이 일을 한다거나 장화에 흙을 묻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날 적마다 다방에 앉아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고, 아가씨들까지 그노무 커피를 사주고는 노닥(?) 거리기를 하루 일과 중 빼놓지 않으시던 분이다. 그렇게 김씨 아저씨는 “김양, 미쓰~리” 부르며 아가씨들과 함께 있는 것을 그리 좋아했다. 심지어는 커피 마시다가 아가씨들이 바쁘면, 짜장면 배달간 나에게까지 커피를 사준다고 와서 앉으라고 할 정도였다. 커피는 꼭 여자와 마셔야 하는 법칙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본인 말에 따르면 정부인 말고 6명의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었다고 하니, 참 보기 드문 바람꾼이었나 보다. 

그런 그가 한동안 조용했다. 동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셨나 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곤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어눌한 말투로 김씨 아저씨가 우리 가게로 전화를 걸어 짜장면 주문을 하셨다. 아저씨집으로 배달을 가서 뵈었더니 초라한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계셨다. 사람 만난 반가움 때문인지, 바쁜 나를 붙들고 울며불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시는데. 

“이봐! 아줌마! 내가 이러고 있을 사람이여?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얼마나 잘 나가고 멋진 사람이었냐구. 내가 견딜 수가 없어 이 신세가….”

쓰러지고 나니 찾아오는 사람 없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으니…. 외로운 맘에 오죽하면 배달 온 나를 붙들고 말하고 싶을까. 그 누가 옆에 있으면서 신세 한탄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춰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곁눈질로 수군거리며 혀만 끌끌 찼다. 누구 한명 가엾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 그런데 남편이 다방에서 놀고 다닐 동안 밭에서 온몸에 흙투성이로 일만 하던 아내가 살갑고 다정하게 그 옆에서 시중드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속이 좋은 건지 배알이 없는 건지 젊어서 그렇게 밖으로만 돌아 다니고, 여자 문제가 복잡하던 남편이 뭐가 좋다고 옆에서 웃음까지 지어가며 정성스레 시중을 들까 싶어서였다. 아저씨 말로는 아프고 쓰러지고 나니까 좋다고 매달리던 여자들이 한 명도 안 보이고 옆에 있는 건 등이 굽은 마누라뿐 이더란다.

아내는 홀로 외롭게 기나긴 밤을 견디어 냈다. 내던지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 키워내며 기다렸을 그 날들….

“계절은 바람 따라가고, 태양은 노을 따라가는데 나는 얼만큼 얼마나 기다려야 그대와 함께 갈 수 있나 혹시나 오는 길 잊어버렸나 정녕 되돌아오는 길 잊어 버렸나….”

임형주가 부른 ‘바람과 구름과 비’의 ost 곡 ‘영원’이란 곡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힘든 시간 보낼 적, 서방은 다른 여자와 딴살림 차려 나가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그 남편이 반신불수 되어서야 자신의 옆에 돌아와 있으니 그거라도 좋아서일까?

연신 수줍은 새색시처럼 미소 지으며, 힘없는 아저씨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는 아내의 모습이 할미꽃 사랑 같아 애잔했다. 그 눈빛엔 진실한 사랑이 전해지고 있었다.

짧은 치마에 진한 향수 뿌리고 다니던 화려한 다방 여자 뒤에 몸빼 바지에 장화 신고 땀 냄새나는 아내가 여자로 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등 굽고 팔자로 휘어진 다리로 서방님 밥상 차리고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그 아내가 진짜 사랑이란 걸 이제는 김씨 아저씨도 알았겠지….

배달음식을 놓고 나오면 추운 겨울날에도 끝까지 문 열어 놓고 배웅하기를 거두지 않는 아내 분이셨다. 평생을 낮은 자세로 살아내신 성품에 고귀함을 넘어 애잔한 존경심까지 일었다.

‘삶을 받아 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일도 견디는 것’이라고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가 말했듯, 주어진 삶을 고스란히 받아내신 그 깊음과 사랑은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더 행복하다’는 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석양이 곱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내가 젊어서 못 받아본 사랑, 나이든 이제라도 흠뻑 받으시길 빌어본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해가 뜰 때보다, 지는 석양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글 _ 박애다 (애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박애다님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서 25년간 중국음식점 ‘목계반점’을 운영해 오고 있다.
삽화 _ 김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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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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