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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궁금증] <50> 디아포라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제국의 침입과 주민 혼합정책으로 유다인 고향 떠나 고유 공동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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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귀향의 꿈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통곡의 벽.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불가피하게 자신의 고향 팔레스티나를 떠나 흩어져 살아야 했다. 디아스포라(Dias pora)는 이산(離散) 또는 분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티나가 아닌 곳에 살면서 유다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다인들이나 그들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디아스포라는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티나 밖으로 퍼져 나가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1년께 앗시리아 침입으로 멸망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앗시리아 영토에 편입됐는데, 이때 많은 유다인들이 고향을 떠났다. 앗시리아 티글랏 필에세르가 쳐들어와 이스라엘 북쪽 왕국 전 지역을 장악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앗시리아로 끌고 감으로써 그곳에 유다인 집단 거주지가 생긴 것이다(2열왕 15,29).

 기원전 598~587년 사이 바빌론이 이스라엘 남쪽 왕국을 침략하면서 많은 사제 계급과 지식층 등 상류층이 바빌론지역으로 끌려갔는데, 이곳에도 유다인들이 무리지어 살게 됐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길에서 벗어나자, 그들은 많은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이국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그들의 성읍들은 적군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의 하느님께 되돌아간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곳에서 돌아와, 자기들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을 되찾고 황폐해진 저 산악 지방에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유딧 5,18-19).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프톨레마이우스 치하에서는 이집트로 이민이 활발했는데, 그것은 생계유지의 방편이었다. 그밖에도 소아시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등으로도 이민을 갔는데, 그중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지역에서는 적어도 100만 명 이상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디아스포라란 제국 통치자들이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팔레스티나지역 주민과의 혼합정책을 폄에 따라 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 이외 지역으로 가서 그들의 고유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활한 지역을 의미하는 용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자 근동에는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됐다. 이 당시에는 교역과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하고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말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 많은 유다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가 나타났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제국 3대 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특히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 영향력은 무척 강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에는 디아스포라가,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에 흩어진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리켰다(1베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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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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