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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궁금증] <55>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했을까

잡혼으로 ''단일성 훼손''한데다 참된 율법 수호자로 자처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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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라크루와 작, 1851년).
 
 
  유다인들은 오늘날에도 하느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선택해 선민으로 세웠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한 후 더욱더 배타적 성향이 강해지고 공동체 특권의식을 강조하게 됐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과 결합돼 자신들의 단일성이 훼손되는 것을 가장 꺼렸다. 이방인들과의 교제나 식사를 율법으로 엄격히 금했던 이유다.

 성경에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의 접촉과 대화가 엄격히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남쪽 유다에서 북쪽 갈릴래아로 갈 때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두 배나 되는 먼길을 돌아서 다녔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더위에 지친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우물가를 찾으셨다(요한 4장 참조).

 유다인들은 민족의 뿌리가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왜 적대적으로 대했을까? 이스라엘 중부 `사마리아` 지역은 본래 유다 땅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유다 임금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아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불렀다(1열왕 16,24).

 사마리아인은 팔레스타인 사마리아 지방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이스라엘 북쪽에는 갈릴래아 지방이 있었고 중간에는 사마리아, 남쪽에는 유다가 자리잡고 있었다. 본래 통일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시대 이후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남쪽은 유다 왕국으로 분열됐다. 그때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가장 번성한 것은 기원전 8세기경이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점령당한다(기원전 722년경). 사마리아는 앗시리아 침공으로 무너진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주민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 이스라엘 12지파 중 10개 지파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사마리아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족을 이주시켜 자리잡고 살게 했다.

 이처럼 앗시리아는 식민지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사마리아 지역은 잡혼으로 종족 간 피가 섞이게 됐고, 그래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원수지간처럼 지내게 됐다. 이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자신들과 구별해서 경멸했다.

 유다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을 심지어 개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기원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도 바빌론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나중에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무렵부터 사마리아인과의 반목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된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즈루빠벨의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과 계속 적대 관계를 갖게 됐다. 소수이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다인의 전통을 지켜온 고대 이스라엘인의 정통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구약성경의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는데, 이를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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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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