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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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7.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17)

그리스도, 여정의 벗이자 ‘사랑의 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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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레사 성녀에게서 심판관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의 심판관이다.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녀 데레사가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 중에는 ‘심판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이 모습은 지난주에 살펴본 ‘왕’이신 예수님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물론 ‘심판관’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 하느님을 정의로운 심판관으로 공경하며 그분의 공평한 심판에 희망을 걸며 역경을 헤쳐 왔습니다. 고대로부터 ‘심판’은 임금이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는 모습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왕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타민족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기대감으로 시작됐으며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개별 인간의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세말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의인에게는 상급을, 악인에게는 영벌을 주시리라는 종말론적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 이런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중심에는 하느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종말에 이르러 당신이 재림할 때 완전히 실현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림 때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당신이 심판관으로서 모든 이들을 심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은 다음과 같은 세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①보상적 차원: 세상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정의에 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즉, 그분은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에게 그에 맞는 정확한 갚음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②구별적 차원: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식별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각자가 일생 하느님께 드리던 응답 여하에 따라 스스로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③계시적 차원: 세상 종말에 하느님의 심판에 이르러 그간 숨겨진 사람들과 사건들의 가치가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의 심판관으로 소개한 성녀 데레사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 심판관이신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심판관 또는 가까이 계신 심판관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녀는 심판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 배필과 정담을 나누러 오시는 이 마당에서도 이토록 우러러 뵙기가 두렵거든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그 날에야 어떠하오니까? 자매들이여, 당신이 무섭게 호령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심부름꾼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하실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영혼의 성 6궁방 9장 5항). 이렇듯 성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멀리 계시며 동시에 우리 곁에 계신 심판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경외심과 신뢰를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성녀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벗이자 신랑으로서 우정을 나누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오셨으며 세상 종말에는 우리 각자에게 이러한 당신의 태도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실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관은 우선적으로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여정의 벗이자 동료이며 신랑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이런 모습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심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어떠한 두려움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신뢰와 기쁨을 갖게 해줍니다. 만일 여기에 두려움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혹여 사랑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성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고백할 때, 거기에는 세속적 심판관에게서 느끼는, 혹여 우리에게 벌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전혀 묻어 있지 않습니다. 성녀는 ‘심판관’이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성녀는 그리스도를 ‘사랑의 심판관’으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향한 넘치는 하느님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녀에게 있어서 ‘심판’은 어떤 신적 규범과 관련된 인간의 응답에 대한 식별이라는 차원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에 의하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영성생활에서 우리들에게 하느님과의 우정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참된 벗이자 사랑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분 마음을 상해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섬세한 사랑의 두려움을 갖게 해줍니다.



이승의 저녁에 사랑의 심판을 받을 우리들

성녀 데레사와 더불어 16세기의 대표적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승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이승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가, 더 많이 알았는가, 더 많은 업적을 이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가장 작은 자들을 돌보며 그들 안에 현존해 계신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 드렸습니까?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여러분들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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