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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4 - 그때 그 모습으로 가슴에 살아계신

박광호(모세,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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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의학박사가 되길 바랐다. 아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장애를 가졌다는 회한이 사무쳤던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의사가 돼 나처럼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당시 가세가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을 의학박사로 만들겠다고 친척들에게 장담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장래 희망이 의사였다. 어머니의 강한 열망이 나의 소망이 되었다. 내가 글짓기에 재주 있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글 쓰는 걸 취미생활로 하되 반드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오래 전부터 들어 왔던 나는 응당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비극이 찾아왔다. 5학년 때 7월 4일의 일이었다. 이날 우리 가족은 해군장교 부부와 함께 군용 지프를 타고 시골 할머니 댁에 갔다. 이 장교는 6ㆍ25전쟁 중에 아버지가 약혼녀 가족을 시골에 피란시켜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고 하여, 직접 어른들에게 인사하겠다고 전부터 수차 말해 왔다.
 아버지는 번번이 사양했다. 장교가 술고래여서였다. 그런데 다시 찾아와 함께 가자고 사정했다. 어머니가 정중히 거절했으나, 곁에 있던 내가 우기다시피 하여 결국 가기로 했다. 왜 그다지 할머니 댁에 가고 싶었는지….
 그러나 역시 술이 사달이었다.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직장에 들르려고 중간에서 내리자, 장교는 운전병에게 술을 하고 가자면서 단골집이 있는 유달산으로 차를 돌리게 했다. 어머니가 만류했으나 딱 한 잔씩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산중턱에 세워둔 지프 안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때 지나던 아이가 차를 밀어버렸다. 지프는 비탈길을 향해 스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10여 미터 되는 벼랑이 있었다.
 혼자 몸인 장교 부인은 밖으로 뛰어내리고, 차 안의 어머니는 삼남매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더니 차가 벼랑에 이르자,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나를 내던졌다. 그런 다음 두 여동생을 밖으로 던졌다.
 나는 아홉 살 여동생과 더불어 벼랑으로 굴렀다. 얼굴과 팔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다. 두 살배기 여동생은 벼랑 아래의 집 대청에 엉덩방아를 찧었으나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렇게 삼남매를 구한 어머니는 미처 탈출하지 못한 채 지프와 함께 추락했다. 나는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 당신은 급히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고 집으로 옮겨졌다. 상태가 심각하여 집에서 임종하도록 한 것이다.
 그날 밤 어머니는 사고 세 시간 만에 운명했다. 당시 레지오 마리애 간부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숙부가 세상 떠나기 전의 어머니에게 비상세례를 주었다. 나는 사고 7년 후 영세하고서야, 어머니가 비상세례 받은 일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랐다.
 어머니 죽음은 열두 살 된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었는지 돌아가신 다음에야 깨달았다. 어머니를 부르면 금방 나타날 것 같은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머니와 닮은 여인을 만나면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서도 변함없다. 어머니가 별세하신 지 54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삼남매는 그분을 잊지 못한다.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나는 더욱 그러하다. 언제나 그때 그 모습으로 가슴속에 살아 있다. 그분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은 시가 되고 기도가 된다. 내가 숨 쉬는 동안 계속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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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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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그 모든 찬양에 찬양을 더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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