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8) 하느님 뜻과의 조화 (12)

신덕·망덕·애덕의 삶 살자/ 하느님과 합치, 이웃에게 연민, 세상과 융화되려면, 마음만 조금 열고 하느님께 몇 발자국 다가가면 돼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관상’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예비신자 때는 간단한 교리와 기도에 대해 배우지만 신앙생활의 경륜이 쌓이다 보면 몇몇 신앙인들은 관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특히 수도자와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이 관상은 필수다. 그 관상 안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진정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삶이 무의미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관상은 과연 무엇일까. 교회에서 말하는 관상은 관상(觀想, contemplatio)이지, 서울 미아리 점(占) 보는 집에서 말하는 얼굴 생김새로서의 관상(觀相)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을 의미한다.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통합적이면서 단순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다. 완전하신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죽은 후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러한 체험을 이 땅에서 희미하게나마 할 수 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관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고 그 충만함 가운데서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관상이 내가 아닌 성인 성녀들만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관상은 매우 어려운 것, 내가 감히 하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아마 성인 성녀들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숭고한 감실을 가지고 있다. 그 감실 안에는 ‘하느님 뜻과 조화’(공명의 빛)가 들어 있다. 그 공명의 빛이 나오도록 하기면 하면 된다. 그러면 하고 싶지 않아도 관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은 실수하는 분이 아니다. 또 불공평한 분도 아니다. 나는 완벽하게 창조됐다. 나만 부실하게 창조하고, 성인 성녀만 완벽하게 창조하실 분이 아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조화되도록 창조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도, 넘실대는 푸른빛의 바다도, 한 송이 꽃도, 날아다니는 새들도 모두 공명적이다. 나 자신의 눈도 공명적이고, 손도, 입도, 발도 공명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다. 눈은 공명적인데 머리는 재미있는 텔레비전을 보라고 한다. 입은 공명적인데 머리가 험담을 하라고 유혹한다. 귀는 공명적인데 머리가 달콤한 말만 골라서 들으라고 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눈으로 들어오고, 입으로 들어오고, 손으로 만져지는데 머리가 그 아름다운 것들을 흉악한 것들로 바꿔 놓는다. 그렇다 보니 몸도 병들고 정신도 병든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아름다움을 망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나의 꼴은 어떤 모습인가. 나의 형태(폼)는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형성(포메이션)되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육신과 지성과 영(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초월적이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자발성을 갖고 직접 초월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상위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상위 형태의 삶은 신덕, 망덕, 애덕의 완덕의 삶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합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연민과 돌봄의 삶을, 세상과는 융화의 삶을 통해 참된 인간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상위 형태의 삶이다.

그런데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위 형태의 삶을 선택한다.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합치되지도 않고, 이웃과 세상에 대해 마음도 열려있지 않다. 폐쇄적이다 보니 나만 옳고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이웃과 세상에 개방되지 못하다 보니 이웃에게 연민 그리고 세상과도 융화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가진 참된 역량을 발휘해 내지도 못한다.

물론 완벽한 신덕, 망덕, 애덕의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당장 완전한 신덕, 완전한 망덕, 완전한 애덕을 성취하기란 어렵다. 그저 마음만 조금 열면 된다. 완덕이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보니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고 판단되는 이들에 대한 간접적 믿음, 희망, 사랑도 필요하다. 무조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순명은 식사할 때 기도를 깜박 잊고 있었는데 8살 꼬마가 “우리 기도해야죠”라고 말했을 때, 그 아이의 말을 믿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희망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믿음, 엄청난 희망, 엄청난 사랑을 목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음만 조금 열고 하느님께 몇 발자국 다가가면 된다. 그러면 완덕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상위 형태의 삶이 다가온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5-2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30

로마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