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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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9) 하느님 뜻과의 조화(13)

완전한 자유 구현하자/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책임 성취하려면, 하느님 섭리대로 세상과 조화 이루며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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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손위에 줄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줄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다. 줄이 손목에 꽁꽁 묶여져 있기 때문이다. 줄은 안개 가득한 저 편 숲 속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줄을 당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반대쪽에서도 그 어떤 힘이 줄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나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일정한 자유와 그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줄다리기를 하는 형태의 자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불완전한 자유다.

나는 줄을 당길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줄을 당겨도 반대편의 힘이 세면 끌고 올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당길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 진다. 줄을 당기지 않을 자유도 가지고 있지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면 끌려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당기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줄을 당겨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불완전한 자유다. 우리의 삶은 자유를 행사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불완전한 자유를 행사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저 편하게 살려고 한다.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려 하지 않고(줄을 의지로 힘껏 당기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편에 끌려가는 삶을 산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렇게 하위형태의 삶에서 보이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끌려가는 삶이고, 수동적인 삶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삶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 각자가 모두 완전한 자유를 구현해 내기를 원하신다. 완전한 자유를 살 수 있는 힘도 심어 주셨다. 완전한 자유는 합치, 연민, 융화, 역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에 대해 연민으로 대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융화하고, 그래서 참된 인간의 역량을 발휘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진정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성취해 내는 것이다. 좋은 일, 형성적인 일을 하고자 하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줄을 힘껏 당겨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뜻과 조화하는 삶, 즉 공명의 삶이다.

이렇게 자유를 성취해 내야하는 이치는 유일회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미 허락되어 있다. 거저 주어져 있다. 그만큼 책임도 무겁다. 받았으니까, 그만큼 역할을 해야 한다. 주인으로부터 씨를 받아든 종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재배해, 열매를 수확해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해 내야 할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져야할 이러한 책임의 모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우선 과도한 책임을 느끼는 이들이다. 자녀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과도하게 책임지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초등학생 자녀에게는 40~50, 중고등학생 자녀에게는 20~30, 대학생 자녀에게는 10 정도의 책임감만 느끼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자녀에게 맡기면 된다. 주변을 보면 결혼한 자녀도 책임지려는 부모들이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직장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과도한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까지도 모두 자신이 하려는 반형성적인 정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 힘들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복숭아를 참외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새우를 고래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과소한 책임도 문제다. “자녀문제? 냅둬~.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뭐.” 자녀들이 스스로 알아서 한다며 방치 혹은 방기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자녀를 낳아놓고 교육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녀에 대한 과도한 책임의식도 문제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삶의 책임은 어떤 모습일까. 대답은 ‘공명적 책임’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책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의 조화 섭리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유일회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인간을 통해 세상이 조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최고의 교육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게끔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섭리하신 대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명적 책임은 조화를 위한 책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조화 그 자체이시니까, 세상이 조화로운 것이다. 그 세상의 일부인 우리도 조화를 구현하고, 조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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