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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2) 하느님 뜻과의 조화 (26)

회개, 단순한 반성 아닌 새로운 삶의 열림이 중요/ 과거에 얽매여 새로운 것 거부하면 아픔 여전해/ 신앙인으로 밝고 행복한 모습 지니는 것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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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많은 신자들을 만나다 보면 유난히 얼굴이 어두운 분들을 볼 수 있다. 한번은 어떤 여성분이 면담을 요청했는데, 죄에 대한 무게 때문에 절망적인 삶을 살고 계셨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온통 ‘회개’라는 단어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삶을 살면서 부족한 면이 전체 삶의 10인 사람이 있고, 80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살아온 환경과 만남이 달랐으니 죄에 대한 체험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잘못된 면이 10면 그 10를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온 90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물론 80 이상을 엉터리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 두꺼운 어두운 층을 빨리 깨고 밝은 세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영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신앙인인 우리들은 밝고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지니는 것이 좋다.

감옥의 수인들에 대한 교정교육에서 ‘회개’에 중점을 두는 것에 대해 그리 올바르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죄인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바로 돌아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효과적 차원에서 봐도 회개보다는 나약함에 대한 인정과 새로운 영에 대한 체험이 더 중요하다.

성당에 다니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죄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것에 대해 자주 봤다. 안타깝다.

일반적인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죄를 짓겠는가. 인간에게는 엄청난 죄를 지을 능력도 없다. 인간 자체가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나약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그 범위 안에서 죄를 짓는다.

회개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로움’이다. 술을 마실 때마다 부인에게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남편이 어느 날 성당에 와서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는 술도 마시지 않겠으며, 아내에게 폭력도 행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남편은 일주일 혹은 한 달이 지나면 십중팔구 다시 술을 마실 것이며,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회개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고쳐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회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초형성적이고, 영적인 것을 내면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영적으로 신선해지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곤란하다. 하느님이 주시는 힘을 계속 받아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회개’를 원한다고 할 때는 단순한 ‘반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값싼 눈물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새로운 지평을 원하신다. 새로운 삶의 열림이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이고 초월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 과거는 늘 우리 삶 안에서 다시 떠오르게 돼 있다.

과거가 떠올라도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먼저 새롭게 돼야 한다. 과거를 현재와 미래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영의 위대한 능력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판단하는 것이 정신이라면, 마음에서 오는 영은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판단한다. 새로운 영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과거를 자학하지 않는다. 죄의식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재를 살찌우고 미래를 열어나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과거의 죄에 우리를 묶어 두시는 분이 아니다. 확확 열어주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하셨고, 바빌론 억압에서 구출해 주신 분이시다.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묶여 있지 말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거에 잘못했던 것은 짧게 파악하고 넘어가면 된다.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 계속 끌고 가거나 매달리면 우리는 녹초가 된다. 새로운 차원의 영, 하느님이 새롭게 주시는 영적 에너지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찰만 하는 사람은 성찰밖에 못 한다.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는 사람은 계속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한다.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의 현존 체험, 초월에 대한 체험, 공명, 경외, 합치, 융화, 연민, 확고함, 부드러움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명은 무기력하지 않고 생생하다. 활력이 넘치는 것이다. 초월적 힘, 영적인 힘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약하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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