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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4) 하느님 뜻과의 조화 (28) 올바른 신앙 위한, ‘치우침 없는’ 저울추

한쪽 성향으로 기울면 바른 영성 도달 힘들어/ 내 계획 아닌, 주님 뜻 알기 위한 열린 마음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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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울이다. 물리적 저울, 마음의 저울 모두 중요하다. 이 저울이 올바르지 않다면 정상적 거래가 불가능해진다.

저울은 일종의 약속이자 기준으로, 올바른 저울을 가지고 있는 상인이 올바른 상인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올바른 신앙을 위해선 올바른 신앙의 저울추가 필요하다. 이 신앙의 저울추에는 특징이 있다. 바로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 영성은 강함과 약함, 길고 짧음, 확고함과 부드러움, 엄격함과 자애로움, 노동과 기도 등 모든 양단을 함께 끌어안는다. 이러한 양단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바꿔 말하면 한쪽 성향으로 기울 때는 올바른 영성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드러움만 있을 때 우리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반대로 확고함만 있다면 자칫 완고함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수락! 이것이 바로 올바른 영성의 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건들을 접한다. 그 사건을 피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맞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 바로 공명(하느님의 뜻과의 조화)의 삶이다. 열려 있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공명의 삶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성적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있다. 바로 ‘머묾’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머묾’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단순히 산속에 들어가 좌선을 하거나 묵상을 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가톨릭 영성에 있어서 ‘머묾’은 그런 하느님 뜻 안에서의 머무는 것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머물되, 주의를 집중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또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다가오는 의미들에 대해 개방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는 하느님에 대한 탐색이다. 또 개방성은 하느님 뜻에 대한 온전한 받아들임이다. 올바른 신앙의 저울추를 가진 사람은 이런 영성이 가능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격받으면 공격한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느끼면 그 즉시 그 사람을 맹렬히 공격한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우선 내가 가진 계획들을 면밀히 재검토해야 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나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누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세우는 계획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우리는 인위적인 계획과 의도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1시간, 아니 10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둔 밤 속을 걸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어둔 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다. 어둡기 때문에 그냥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환한 대낮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할지 판단하느라 머리가 아프겠지만, 세상살이는 어둔 밤이다. 모르는데 뭘 하겠는가. 그저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조금씩 발자국을 떼면 된다. 어둔 밤 속에서 필요한 것은 랜턴의 강한 불빛이 아니라, 그저 신앙 저울추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어둔 밤에 방치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깜깜한 방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서서히 커튼을 열어 빛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당신을 활짝 펼치시며 나를 통해 공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이를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이 열려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 감옥에 갇혀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항상 문을 열어 놓고 하느님의 뜻이 방문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한 평도 안 되는 내 안에 갇힌 그런 답답한 삶을 언제까지 계속 이어갈 것인가. 활짝 나를 개방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나의 방 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올 수 있다. 이런 기막힌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이미 창조되었다고 답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내 안에 갇힌 삶을 살아가면 이런 엄청난 체험을 할 수 없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확’ 바뀌어야 한다. 각자 공명의 올바른 저울을 가지자.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수락을 하자. 주의를 집중하면서, 개방성을 견지하면서 공명의 신비 안에 머물자. 더 이상 내 안에 갇혀 살아가는 우(愚)를 범하지 말자. 갇혀 살아가면 생각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

시간이 아깝다. 어제 생각한 것을 오늘 생각하고, 또 내일도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아깝지 않은가. 내일에는 바뀌어야 한다. 아니, 1시간 단위로 확확 바뀌어야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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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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