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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7) 하느님 뜻과의 조화 (31) 세상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 충실히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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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은 그 섬엔 / 문명이 할퀴고 간 초라한 그 모습 / 보고픈 소녀는 어디론가 떠나고 / 외로운 갈매기만 음- 슬피 울고 있네.’

가수 윤수일은 자신의 노래 ‘환상의 섬’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슬픔의 환상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도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1478~1535)가 그리스어의 ‘없는’(ou-)과 ‘장소’(toppos)라는 두 가지 의미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용어다.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 환상의 섬인 셈이다.

가톨릭 영성은 이처럼 공중에 붕 뜬 상태의 유토피아적 환상의 영성이 아니다. 하느님 뜻과 조화된 삶, 즉 하느님과 함께 울림을 갖는 공명의 삶은 환상을 넘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이다. 실천해서 영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을 구현하면 저절로 실천이 발현된다.

환상적 영성에 사로잡혀 사는 많은 신앙인을 봐왔다. 자신의 가치관과 판단, 영적 황홀경, 신념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스스로 생각하는 종교적 가치 혹은 신념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절대적 신념은 대부분 절대적 오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예를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파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철저히 종교적 삶을 살았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자신들이 만든 가치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사이파는 나쁜 신앙인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과연 바리사이파처럼 철저히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가. 과연 오늘날 그 누가 바리사이파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리사이파들은 넘지 못한 산이 있었다. 그것은 아집과 독선이었다. 철저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회에 공로를 쌓지도 않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작은 성냥갑 안에 갇혀 살아가지 말라고 했다. 성냥은 성냥갑 안에만 있으면 의미가 없다. 성냥갑 안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불태워야 한다. 그래야 성냥의 존재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본 이후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초막을 짓고 예수님과 함께 그냥 이대로 천년만년 살자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을로 다시 내려가자고 했다.

마치 한 달 피정을 마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환상적인 그 신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충만한 행복감에 싸일 수 있다. 마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격한 베드로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행복에 머물고 주저앉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영광을 직접 보여주신 이유는 마을로 다시 내려가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사신 분이다. 그분이 한 행동을 주목해야 한다. 온 갈릴레아 지방을 돌아다니셨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을 뽑아서 당신을 계승하도록 하셨고,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기억해 보라. 돌아가시면서 당신 몸을 기증하셨다. 세상에 무관심하거나 도피하지 않으셨다. 은총 충만함, 그 안에 머물지 않으셨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공명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우선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동서남북 모든 곳에 관심을 두신다. 당신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이시다. 따라서 우리도 역동적인 영성을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창조하실 때부터 미리 형성되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칼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수술하는 시간은 환자의 몸을 새롭게 치유하는 거룩한 시간이다. 칼은 하느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도구지만, 그 사용 방법에 따라 하느님 뜻을 구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서 모든 사회 문제에 거칠게 대응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메시지, 예수님이 요청하시는 메시지를 세상에 분명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을 연민으로 대하고, 세상과 융화하고, 하느님께 받은 좋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 신앙의 확고함 속에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영성은 단순히 촛불 켜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정신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동서남북, 온 세상을 향해 뛰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가톨릭 영성의 모습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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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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