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9) 하느님 뜻과의 조화 (33) 주님과 조화된 삶 위해 극복해야 할 고난

공명의 세상과 불공명 상황은 함께 존재 / 예수님도 피·땀의 불공명적 상황 이겨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가능한 한 쉽게 현대 가톨릭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어려운 용어를 피하려 했지만 이번 주는 어쩔 수 없었다. 단순화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선, 몇몇 부분에 대해선 어려운 글쓰기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듯 읽다 보면 조금은 영성적 삶의 의미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공명의 삶(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공명(共鳴)은 말 그대로 ‘함께 소리를 울리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는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이다. 이 공명이 미국 현대 영성에서는 하느님 뜻과 조화로운 삶을 규정하는 의미 있는 신학적 용어가 된다.

우리의 삶은 공명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에 대해 연민을 갖고, 융화적 분위기 속에서 각자가 창조주로부터 받은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공명의 삶을 성취하면 나 자신의 내면을 형성할 수 있고,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상호 형성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나를 형성하고 세상을 형성한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형성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바로 공명의 삶이다. 여기서 이른바 공명, 재형성, 다시 공명의 순환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세상과 나를 미리 형성하신 그 의미를 구현해 내지 못하면, 즉 반형성적으로 살면 공명의 삶은 불가능해 진다. 하느님의 울림에 동참하는,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그러한 삶이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이 세상(형성의 장) 안에는 역설적으로 불공명적인 요소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 뜻에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좋은 의도와 신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종교 테러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 등이 좋은 사례다.

멀리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충만한 공명의 삶을 가로막는 수많은 사건을 접하며 살아간다.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음주운전 차량이 갑자기 내 차에 돌진해 큰 사고가 났다. 응급실로 실려 갔다. MRI 촬영을 비롯해 정밀 진단을 받았다. 진단 결과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다리를 자르면 영구히 불구의 몸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 이때 의사도 행복하거나 기쁜 것이 아니다. 힘들다. 이 상황에서는 환자와 가족, 의사 모두 불공명적인 시간체험을 한다. 하지만 환자가 남은 생애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극 결단을 해야 한다. 빨리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명적인 삶, 즉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불공명적 상황 혹은 시간을 체험한다. 의인의 삶, 공명의 삶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형성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희생이 필요하다. 고난이 필요하다.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버티기로 일관한다면 몸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마음으로 이뤄진 존재인데 다리 절단 환자의 상황은 육체가 극단적 불공명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정신과 마음마저 불공명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러한 불공명적인 세상을 공명의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불공명을 공명으로 바꾸는 진정한 모델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불공명을 직접 체험했다. 배고프고, 박해받고, 피와 땀의 고난도 겪으셨다. 이러한 고난들은 공명적인 시간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도 불공명의 시간체험을 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형성의 장이 마련된다. 재형성을 통해 세상에 사랑이 들어온다.

우리는 불공명적 요소들을 공명적 요소, 즉 하느님 뜻에 따르는 차원으로 옮겨 가야 한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역동적인 고난의 투쟁을 통해 불공명적 요소를 공명적으로 바꿔나가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 정의와 평화,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공명적 사람(하느님 및 세상, 동료와 조화롭지 않은 사람.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을 방해하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불공명적 상황(하느님 뜻과 조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상황)도 수없이 접한다. 이것이 바로 불공명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늘 재형성 나아가 초월적 형성의 선물을 공짜로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생활한다면 이러한 불공명의 시간을 잘 버텨낼 수 있다. 그래서 공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행복의 나라다. 공명의 세상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지만, 불공명의 상황 또한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다. 불공명을 넘어 공명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그러면 ‘아직’을 초월해 ‘이미’를 성취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방법들에 대해 살펴볼 때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0-14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시편 130장 7절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나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