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183) 바람을 꼭 닮은 아저씨 (1)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겨우내 닫아둔 창문을 봄기운에 처음으로 열었더니, 시원하게 차가운 바람 한 줌이 참으로 맑은 정신을 갖게 해줍니다. 바람의 촉감에 눈을 감고 있으면 ‘아, 좋다’는 느낌과 함께 그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얼굴이 의식 안으로 들어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해마다 봄이 되면 찾아오는 얼굴! 50대 중반의 나이에 짧은 머리칼과 긴 눈썹, 목에는 호스를 꽂고 있었으며, 코에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던 K형제님이었습니다. 그분을 처음 뵌 지는 약 16년 전 어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의 병실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 달에 한 번 그곳 병원 미사와 함께 입원환자들 봉성체를 해주던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분이 누워 계신 병실에 갔을 때 그분은 오랫동안 아무런 보호자 없이 혼자 외롭게 누워 계신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병실에 들어서려고 하면 그 전에 먼저 애써 힘든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으시고, 성체를 영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보면,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편안히 누워 계시라고 말씀을 드리지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늘 그렇듯 정중하게 무릎 꿇고 눈을 감으시고 정성스레 성호를 그으시며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영성체를 하고 나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저의 손을 잡으시면서, 가녀린 숨소리로 들릴 듯 말듯 목소리로 “고.맙.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통해서 그분을 뵐 때마다 그분이 비록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다 지금 단지 순박한 모습으로 사시는 모습, 그 자체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말 많은 세상 속에서 ‘침묵’과 더불어 자신의 오랜 병마와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숭고함까지 느껴졌습니다.

때로는 호흡 도중 목에 가래가 끼면 굉장히 답답해하시고, 급히 간호사가 달려와서 목에 껴있는 가래를 힘겹게 빼내줄 때면, 얼굴 표정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말없는 침묵과 웃음으로 간호사의 손길에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오래된 외로움을 ‘깊은 고독’으로, 찌든 가난함을 ‘맑은 청빈’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가운데 병원 측의 어떤 지시에도 침묵으로 순응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분은 세상의 구도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집착과 아집을 거의 다 내려놓은 듯 살아가는, 참 운치 있는 수도자의 모습 말입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힘들고 비참한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기도 속에서 같은 병실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에서는 뭔가 제 마음 한 구석을 꿈틀대게 하였습니다. ‘석진아,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니…’

비록 목에는 구멍을 뚫어 가파른 숨을 내쉬고, 코에는 산소호흡기마저 꽂고 있었기에 행동 하나 하나가 불편하셨지만, 외적인 것들엔 전혀 얽매이지 않고 ‘깊은 침묵’과 ‘기도’의 시간으로 자신의 삶의 시간을 보내는 그분은 이 세상 안에서 봄의 기운을 알려 주는 바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3-1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집회 7장 30절
너를 만드신 분을 온 힘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봉사자들을 버리지 마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