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26)계시에 대해서…(11)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인간의 육신·정신·영 주도권 주님께 있어/ 그분 뜻대로 인간의 삶 행해지고 만들어져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오랜 기간 사람들은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분리해 놓고, 육신을 마치 죄 덩어리로 생각했다. 영혼을 더 높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의 동반자로 체험하면 영과 정신과 육신은 따로 분리할 수 없다. 그분이 만들어놓은 창조 이래 최고의 아름다운 작품을 어떻게 이것저것 쪼개 분리해서 묵상할 수 있겠는가.

육신이 없으면 정신은 없는 거다. 육신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죄를 지으면 육신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정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신의 죄를 강조하셨다. 극단적으로 농담 조금 섞어서 말하자면 중세 때 육체적 고행을 했던 이들에 비하면 아침저녁으로 화장하며 육신을 아끼는 현대인들이 훨씬 낫다. 육신을 아끼고 고결하게 여겨야 한다. 그 육신에 우리 구원의 뿌리가 있다.

어쨌든 우리가 사랑의 동반자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 영과 지성과 육신이 한 덩어리라는 걸 알게 된다. 인간에 대해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이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의 동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깊이 있는 연결 속에서 우리는 이내 동반자가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신과 정신과 영이 함께 걸어야 할 그 길의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좀 더 깊은 차원의 이해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아버지의 강하고 믿음직한 손을 잡고 걷는 어린아이가 된다. 함께 길을 걸어가지만 우리는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가 그러듯이 우리는 온전히 매달리고 의지하면 된다. 불교에서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바로 무아(無我)다. 나를 버리고 무(無)가 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주도권은 그 분이 쥐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사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셔서 가능한 일이다. 착각은 곤란하다.

직장에서 내가 주도권을 쥐려 해선 안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무슨 협회, 무슨 무슨 단체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주도권을 쥐려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신앙인들도 마찬가지다. 성당에서도 구역장 반장이 주도권을 쥐려 해선 안 된다. 레지오 마리애 단장이 주도권을 쥐려 해선 안 된다. 꾸르실리스따가 본당 주도권을 쥐려 해서도 안 된다. 성당에 오래 다녔다고 이제 막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해 주도권을 쥐려고 해선 안 된다. 이제 막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이 조그만 어떤 단체에서 주도권을 쥐려 하면 그것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옳지 않다. 심지어 본당 신부도 성당의 모든 주도권을 쥐려 해선 안 된다. 돈을 벌지 말고, 명예도, 신앙도 완전히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시골에 들어가 살라는 말도 아니다. 돈도 벌고 명예를 누려도 상관없다. 단지 모든 주도권이 그분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분 뜻대로 살 수 있다. 그분이 나의 맏형님이시고, 그분이 인간의 원형이고, 그분이 새로운 아담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내려오셨겠는가. 주도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있는데 인간들이 다 스스로 주도권 갖고 살려 했다. 성조들과 예언자들 판관들을 통해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고 수없이 가르쳤는데도 인간은 알아듣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매일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것이다. 주님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것은 모든 주도권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종말이 언제 찾아올지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예수님은 정확히 답변하신다. “나도 모른다.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도 그분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다. 대충 ‘하느님 아버지 믿습니다. 저 잘 되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당신이 주도권을 가졌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주도권 행사 안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분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 알아도 진리를 거의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1-12-1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예레 4장 3절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가시덤불에는 씨를 뿌리지 마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