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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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쩌나] 396. 이웃 사랑 참으로 어렵습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상담을 원하시면 010-5032-7422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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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주님께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지만 어렵습니다. 사랑은커녕 미워하지만 않아도 다행일 정도입니다. 저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답 :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초기 성인기에 완수해야 할 과제입니다. 관계 맺기에 별 이상이 없으면 30세가 넘으면 싫은 사람이나 상황을 견뎌내고 존중하는 힘과 여유를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장ㆍ단점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어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요.

관계 맺기가 잘 안 되는 것은 첫째,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할 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왠지 나를 꺼리는 것 같다’거나 ‘상대방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민감한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생겨도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아 다른 이들의 손길을 거부하기에 관계 맺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고, 비교적 편안하게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을 ‘굴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때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자기가 좋아하고 인정하는 사람들과만 끼리끼리 다니려는 편협성을 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다 보면 나이 들수록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괴팍해집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 식당이나 성당 자리를 친한 사람들끼리 쓰지 못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심리적 거리를 두려고 할 때입니다. 물론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리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또한, 자기 내부의 공격성이 튀어 나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심리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의를 지킨다고 하지요. 예의란 존중의 의미뿐만 아니라 방어적 개념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리가 지나칠 경우 생기는 부작용은 거리를 두어서 갖는 편안함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합니다. 서로 존중하라는 말은 이런 심리적 거리 때문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데 나를 거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계 맺기는 신앙생활에서도 같게 나타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느님이 나를 미워하실지도 몰라’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하고 혼자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자기 방식대로만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도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보면서 자기식의 신앙생활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 교주들의 성경 해석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런 현상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내적인 문제, 특히 병적인 대인관계가 신앙생활로 연장되어 나타난 경우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하느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지옥은 왜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안 만들었다. 나를 싫어하는 놈들이 자기들끼리 만들었지.” 그러자 그 사람은 “흠 그렇군요. 그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은 왜 연옥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지요.

하느님께서 한숨을 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그 아이들 때문에 나도 골치 아프다. 천당 입구까지 달려와서는 들어오려고 하지를 않고 내가 부르면 자기들은 아직 자격이 안 된다면서 울며불며하는데 등 돌려 도망치지도 멀리 가지도 않고 근처에서 내가 자기들을 미워한다고 속을 있는 대로 태우는구나. 그렇다고 지옥으로 보낼 수는 없고 해서 대안으로 속태우며 살라고 연옥을 만들어줬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은 일상에서건 신앙에서건 아주 중요합니다. 관계 맺기가 잘 안될 때에는 내가 가진 문제를 잘 보고 교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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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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